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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퀘 for 베망
* 현대물 패러렐
* 은 언제나 캐붕을 동반함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기 위해 빼곡하게 줄을 선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상영관 안은 한산했다. 몇 안 되는 관객은 대부분 커플로 보이는 남녀들이었다. 리무스는 레귤러스에게 잡힌 손에서 식은땀이 차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심코 팔을 뒤틀자마자 레귤러스는 손을 떼어냈다. 어떻게 보면 가차 없게 느껴질 정도로 빠른 반응이었다.
인파를 헤칠 적에 붙잡혔던 손이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광고 소리는 그러잖아도 어둠에 휘감긴 시야를 더욱 흐릿하게 만들었다. 리무스는 뒤를 돌아본 레귤러스가 입모양으로 소리 없이 “미안해요.”를 만들어 보이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보았다. 무엇이? 손을 잡은 것이? 생뚱맞은 멜로 영화가? 아니면 오늘 하루 그 자체가?
리무스는 멜로드라마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그 감정은 자신이 지금 처해있는 상황에 대해 느끼는 것과 똑같았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굳이 표현하자면 얼떨떨하고 조금 어색한 기분. 러브신은 길지도 적나라하지도 않았지만 리무스는 앉은 자리에서 공연히 몸을 한 차례 뒤척였다. 다음 순간 그는 그것이 레귤러스에게 퍽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입 안에서 손톱만큼 작아진 사탕을 앞니로 잘근잘근 부숴 삼키며 리무스는 사탕 봉지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들이 입구에서 스쳤다. 마디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크게 울려서 리무스는 저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실례.” 레귤러스의 속삭임에서는 달짝지근한 향기가 났다. 후각은 쉽게 피로해지는 감각이다. 그러나 리무스는 영화가 이어지는 내내 그 향을 맡았다.
구둣발소리가 멀어지고 정적이 찾아왔다. 텅 빈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채 여자는 흐느꼈다. 그렇지만 잠시 후 그녀가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을 때, 그 얼굴이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것을 보고 리무스는 저도 모르게 아 하고 짤막한 탄식을 뱉었다. 옆자리의 레귤러스가 힐끗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잘 봤어.”
영화는 리무스의 머릿속에 나름의 인상을 남기고 끝났다. 그래서 리무스는 온전히 진심이라고도 할 수 없지만 또 마냥 겉치레만은 아닌 인사말을 건넸다. 리무스의 감사에 담긴 모호함을 눈치 챘는지, 레귤러스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운 건 이쪽이죠. 취향은 아니었을 텐데 용케도 같이 봐 줬네요.”
“제목만 보곤 몰랐어. 네 취향이 저럴 줄도 몰랐고.”
“내 취향도 아닌데.”
물음표를 띄운 리무스의 얼굴을 보며 레귤러스는 변명하듯이 다소 미적지근한 문장으로 대답했다.
“원래 이런 때엔 이런 영화를 보는 거예요.”
“이런 때가 뭔데?”
거기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레귤러스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는 손목시계를 힐끗 보고는 어둑해져가는 하늘에 눈길을 던졌다. 자연스레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드는 리무스의 귓전에서 레귤러스의 목소리가 너울거렸다.
“하루가 생각보다 짧네요.”
“만났을 땐 이미 오후였으니까.”
“그랬죠.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오전 내내 고민하는 게 아니었는데.”
카페테리아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레귤러스가 뱉는 말의 상당수는 어딘가 흐리터분했다. 성분이 듬성듬성 구멍 난 문장을 들으며 리무스는 입꼬리를 모호하게 끌어올렸다. 구태여 캐묻고 싶은 생각이야 없었지만 자꾸만 에두르려는 것이 그가 짧게나마 보고 들은 레귤러스의 성미와는 영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위화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귤러스는 리무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위팔을 가볍게 쥐고 당기는 손에 하도 스스럼이 없어 리무스는 얼떨결에 몇 발짝 끌려가서야 제 걸음을 찾았다.
“밥이나 먹으러 가죠. 맛있는 곳을 알아요.”
그들은 길모퉁이를 몇 차례 굽이돌았다. 저녁의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불빛들. 소리들. 감각은 홍수처럼 밀려드는 지각 대상들로 인해 약간 어지럽혀졌고 리무스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의 육하원칙 중 몇 가지를 알 수 없었다. 이를테면 ‘왜’와 같은 것들.
대로변에 접어들었을 때 레귤러스는 리무스의 손을 놓고 리무스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치를 옮겼다. 그 동작이 아주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오른쪽을 향해 말하던 리무스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왼쪽으로 따라 돌아갔다. 대화는 전혀 끊어지지 않았다. 상황은 아주 매끄럽게 이어졌다. 그들이 왼쪽에 차도를 두고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리무스가 깨닫게 된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설마. 하고 리무스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낯익은 간판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빈 자리가 있기를 바라자고요.”
레귤러스는 가게 문을 밀어 열었고, 순간적으로 리무스가 먼저 들어가기를 기다리려는 것처럼 문을 잡은 채 리무스를 쳐다보았다. 리무스는 조금 전 길에서 레귤러스가 자신의 왼쪽으로 옮겨갔을 때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약간 굳어졌다. 그러나 리무스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레귤러스는 가게 안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리무스는 왠지 모르게 안도하며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가게는 붐비었다. 그들은 구석 쪽의 테이블에 가까스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솜브레로를 쓴 종업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건넸다. 레귤러스는 사뭇 결연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펼쳤다. 들뜬 리무스는 레귤러스의 말을 다 기다리지 못했다.
“여긴,”
“치킨 퀘사디야가 제일 맛있지.”
말을 가로채인 레귤러스가 입을 일자로 다문 채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을 짓는 것이 왠지 모르게 리무스의 흥을 돋웠다.
“우린 여기 단골이야. 시리우스에게 들어서 알고 온 줄 알았는데.”
“당신은 형과 내 사이가 어떤지 종종 잊어버리는 것 같네요.”
비꼬듯 툭 내뱉었지만 레귤러스는 난감해했다. 리무스는 스스로가 심술궂다고 생각하면서도 웃음이 비집고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리무스는 엄지와 검지를 들어 말려 올라가는 양쪽 입꼬리를 가볍게 문질렀다. 종업원을 불러 퀘사디야와 맥주를 주문하는 레귤러스를 향해 그는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억울해?”
“조금.”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는 몸짓에 엷은 짜증이 밴 것이 보여 리무스는 결국 짤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맛있게 먹으면 되는 거잖아.”
맞는 말이었다. 요리도 맥주도 만족스러웠고 리무스는 레귤러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즐거워했다. 그는 처음에는 허둥거리는 레귤러스를 놀리기 위해 웃었고, 다음에는 퀘사디야의 맛과 레귤러스가 던진 몇 가지 농담에 기꺼워서 웃었다. 레귤러스는 결과에 만족했다. 과정까지 신경 쓰기에는 조금 지쳐 있었다. 해가 저물고 있어 신경이 곤두선 탓도 있다. 매너가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레귤러스는 자꾸 시계를 보았다. 리무스는 레귤러스의 무례함을 나무라지 않았다. 반 잔의 맥주는 리무스의 볼에 엷은 홍조를, 갈색 눈동자 위로 오르내리는 눈꺼풀에 완만한 웃음을, 듣기 좋은 나지막한 목소리에 가벼운 활기를 더했다. 때문에 레귤러스는 조금 넋을 놓았다. 방심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아까 그 말은 무슨 뜻이었어?”
“뭐가요?”
대답이 빨랐다. 어색한 타이밍은 레귤러스의 반문이 공연했다는 것을 말보다 더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리무스는 부연하는 대신 고개를 살짝 갸울여 레귤러스의 눈을 비스듬히 들여다보았다. 레귤러스는 그 시선에 대응해 잠시 동안 눈싸움을 벌였다. 상대인 리무스는 눈싸움이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극히 무의미한 시합이었다. 그마저도 먼저 눈을 돌린 것은 레귤러스였다.
“그거 진짜예요.”
리무스는 맥주잔을 기울였다. 흰 울대뼈가 오르내렸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레귤러스의 손에서 검지가 순간적으로 까닥거렸다. 쓰다듬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탓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레귤러스는 엷은 자괴감에 휩싸였다. 리무스가 중얼거린 것은 그 때였다.
“너 농담은 정말 재미없게 하는구나.”
레귤러스가 테이블 위에 턱을 괴자 리무스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리무스는 물러날 것처럼 잠시 움찔거렸다.
“글쎄요. 어떨까.”
“레귤러스.”
“농담이라고 생각했다면 왜 따라온 건데요?”
“시리우스 블랙의 동생이니까?”
레귤러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리무스의 작은 복수였다. 그는 웃었고, 따라 웃는 레귤러스가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그 의문형의 대답을 이해했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약간의 사이는 있었지만.
“농담이라고 생각한 건 맞아. 하지만 네게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나라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했어. 네가 이유 없이 나한테 연락한 건 아닐 테니까.”
레귤러스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는 것을 보며 리무스는 천천히 덧붙였다.
“사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직 잘 이해가 안 가지만.”
“내가 당신에게 연락을 한 게.”
질문이라기보다 단정에 가까운 묘한 어조로 레귤러스는 리무스의 말을 대신 끝마쳤다. 리무스는 고개를 끄덕여 확인 도장을 찍고는 접시에 덜어 둔 마지막 퀘사디야 조각을 입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나초 바구니를 사이에 두고 맥주잔을 마저 비우는 동안 레귤러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조금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벼운 농담들. 영화. 책. 얼마 안 되는 인간관계의 공통분모 등. 리무스는 여전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밖은 캄캄했다. 레귤러스는 만일 시선만으로 닳게 할 수 있었더라면 진작 너덜너덜해지고 말았을 시계를 다시 한 번 힐끗 보고는 가랑잎 같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어 레귤러스가 입을 뗐을 때, 리무스는 저도 모르게 조금 부아가 났다.
“고마웠어요, 리무스.”
“뭘. 장소도 네가 정하고 돈도 네가 다 내고 난 따라다닌 것밖에 할 게 없는걸.”
짐짓 가시를 세운 응수에 레귤러스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리무스는 그에게서 속내를 듣기는 도시 글렀다는 생각을 하며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에 섞이어 말이 흘러나왔다.
“제대로 갚기나 하라고.”
레귤러스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리무스는 덧붙였다.
“빌려간 하루 말이야. 다음엔 내가 보고 싶은 영화 보고, 내가 먹고 싶은 거 먹고, 돈도 내가 전부 낼 테니까.”
대답을 대신하는 레귤러스의 미소는 한 가지로 헤아리기 힘든 다채로운 색채를 띠고 있었다. 레귤러스 자신도 제 심중을 잘 몰랐으니 리무스의 경우에는 두말 할 것도 없었다. 그 미묘한 얼굴에서 망설임밖에 골라낼 수 없었던 리무스는 가볍게 혀를 차고는 손을 내밀었다. 갑작스럽게 내밀어진 손에 레귤러스는 어리둥절해했다.
“휴대폰 이리 줘. 번호 찍어줄게.”
“괜찮아요.”
“무슨 말이 그래? 싫으면 싫다고 하던가.”
“번호 알아요.”
“알고 있어? 내 번호? 그럼 왜 시리우스 걸로 전화를 걸었어?”
“내 번호였으면 받았겠어요?”
안 받았겠지. 리무스는 대답을 입 속으로 삼켰다. 그는 그러는 통에 레귤러스더러 제 번호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것을 잊어버렸다. 레귤러스는 그 소리 없는 대답을 들은 듯 비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거예요.”
“초탈한 사람처럼 말하네.”
레귤러스의 입술이 순간적으로 달싹거렸다 다물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리무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곧 죽을 거니까. 말하려고 했었다는 것을 리무스는 알았고 레귤러스는 리무스가 알았다는 것을 알았다. 레귤러스는 설핏 식는 공기를 내물리려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못 당하겠네.”
대꾸하려 했을 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액정에는 제임스의 이름이 떠 있었다. 제임스일까 시리우스일까. 평소라면 당연히 제임스라고 생각했을 것을 처음으로 헷갈려하며 리무스는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레귤러스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이루어진 사람이 흔히 짓곤 하는 놀라움이 엷게 담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웃음에 이내 장난기가 섞여 번졌다. 레귤러스는 알아볼 듯 말 듯 한쪽 눈을 깜빡거렸다.
“오늘 일은 형에게는 비밀로 해줘요.”
“음…… 어디까지를?”
“휴대폰부터 전부.”
“꽤 까다로운 주문인데.”
“그러게 될 거예요.”
“또 그러네.”
레귤러스는 어깻짓을 했다. 그는 여전히 중요한 것들을 설명하지 않은 채로 리무스에게 에스코트를 제안했다. “바래다줄게요.” 농담이라기엔 진중한 그의 얼굴을 본 리무스는 어째야할지 몰라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을 빠르게 알아차린 레귤러스가 제풀에 손을 저으며 농을 친 것으로 부드럽게 넘기고는 작별인사를 건넸다. 손끝조차 닿지 않았는데도, 잡아당겨졌다가 갑작스레 밀쳐진 듯한 느낌이 너무나도 선했다. 리무스는 망연해졌다.
작아지던 레귤러스의 뒷모습이 완전히 인파에 파묻혀버렸을 때, 그제야 비로소 리무스는 자신이 그날 떠올린 수많은 ‘왜’ 중 어느 것 하나에도 제대로 된 답을 얻지 못한 채 하루가 끝났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갑작스레 피로가 몰려와 리무스는 선 자리에서 끙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리무스는 가까스로 겉옷을 벗고 곧바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읽고 써야 할 것들이 어지럽게 널린 책상 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정신없이 지나간 하루였고 밤은 하루가 그랬던 것만큼이나 짧았다. 리무스는 죽은 듯 잠에 빠져들었다.
구겨진 셔츠가 등에 배겨 눈을 떴을 때 해는 중천에 솟아 있었다. 오전 강의가 없는 날이라 알람이 울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고수하는 리무스가 아침에 눈을 뜨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대로 소소한 사건이었다. 리무스는 부스스 일어나서 구겨진 옷을 벗어 빨래바구니에 던져 넣으며 시계를 보았다. 친구들과 같이 점심을 먹기 위해 그는 조금 채비를 서둘렀다.
[창가 자리]. 문자를 받은 리무스는 곧장 구내식당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먼저 앉아있던 제임스와 피터를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제임스가 리무스 몫으로 미리 갖다둔 피시 앤 칩스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리무스. 너 늦잠 잤지?”
“어떻게 알았어?”
“네 눈이 말하고 있다. 아직도 졸리다고.”
리무스는 코웃음을 치며 제임스의 머리를 헝클었다. 야! 밥 먹고 릴리 보러 갈 거란 말이야! 옆자리에 앉은 피터가 낄낄거렸다.
“시리우스는?”
“그 자식 오늘 학교 안 왔어.”
“뭐? 왜?”
“몰라. 아침에 눈 뜨니까 없어서 먼저 나간 줄 알았는데 오전 강의 전부 빼먹었어. 대충 얼버무려서 넘기긴 했지만 원래 말이라도 하고 땡땡이치던 놈인데──”
리무스의 휴대폰이 울린 것은 그 때였다. 액정 위에 뜬 낯선 번호를 보며 리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음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전날의 일이었다. 어떻게든 관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리무스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소 의외였지만, 아주 예측 불가능했던 상대는 아니었다.
[리무스? 나야.]
“시리우스. 너 대체……”
[전화기 잃어버려서 다른 사람 걸 빌렸어. 다들 같이 있어?]
“그렇긴 한데 너 어디야? 제임스보다 먼저 나갔다면서 강의도 안 들어오고.”
[집에 일이 생겼어. 모레부터는 학교 나갈 거고 자세한 건 그때 가서 얘기해줄게. 애들한테도 그렇게 전해줘.]
“잠깐만! 시리우스. 저기,”
리무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했다. 오늘 일은 형에게는 비밀로 해줘요. 레귤러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레귤러스에게 무슨 일 있어? 그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질문을 바꾸었다.
“……무슨 일 있는 건지 얘기해줄 수 있어?”
수화기 저편에서 시리우스가 숨을 삼켰다. 리무스는 눈을 내리깔았다. 잡음이 섞인 시리우스의 한숨은 밭은기침처럼 가칠가칠했다. 시리우스는 답지 않게 오랫동안 망설였지만 결국은 내켜하지 않는 목소리로 입을 뗐다.
[레귤러스가——]
뒷말은 이명처럼 날카롭고 먹먹하게 울렸다. 리무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휴대폰을 귀에서 떨어뜨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제임스와 피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리무스는 대답 대신 제임스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여보세요, 시리우스?
사흘 만에 학교에 나타난 시리우스의 얼굴은 리무스나 다른 이들이 예상했던 것만큼 수척하지는 않았다. 그는 부모를 대신해 학교에서 레귤러스의 흔적을 지우는 모든 일을 맡아서 했다. 블랙 부부가 원한 것은 휴학 신청이었지만 시리우스는 자퇴 신청서를 작성했다. 그러고 나서는 학교에 남아있는 레귤러스의 개인 사물을 정리하는 것이 끝이었다. 한 사람의 흔적이라는 것은 그토록 쉽게 지워질 수 있었다.
제임스와 피터, 리무스는 시리우스가 레귤러스의 로커를 비우는 것을 돕기 위해 법대를 찾았다. 건물은 깨끗했고 곡선이 전혀 없었다. 셋은 크고 멀끔한 유리문 앞에서 한 차례 주춤거렸지만 시리우스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시리우스가 공대에 원서를 넣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오리온은 시리우스의 멱살을 잡아끌고 법대를 찾았었다. 그러나 그는 절연을 각오한 큰아들의 고집을 끝내 꺾지 못했다.
로커 안에 든 물품들은 일반적인 법대생의 것보다 훨씬 적었다. 손 댄 흔적이 거의 없는 책들이 몇 권, 자질구레한 학용품들이 몇 점. 마치 일부러 비워둔 것처럼 보이는 그 금속성의 여백을 리무스는 망연히 보고만 있었다. 부산스레 비품들을 챙기는 세 사람 뒤에서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리무스를 지나가는 법대생들이 이따금 힐끔거렸다.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을 참을 수가 없는지, 어떻게 터뜨려야 할지 리무스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피곤으로 무겁게 가라앉은 시리우스의 등에 대고 몇 번이고 미안하다는 말을 삼켰다. 의미 없는 사과였다. 이유도 없이 그런 기분이 들었다. 레귤러스의 죽음이, 그 일이 일어나리라는 레귤러스 자신의 단언만큼이나 분명하게 정해져 있던 일인 것 같은 기분이. 자신은 무엇도 바꾸지 못했으리라는 기분이. 그것은 한편으로는 무력감이기도 했다.
며칠 동안 퓨즈가 하나 나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시리우스는 차츰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렇게 말한 것은 아마 제임스였을 것이다. 시리우스는 다시금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고, 수업시간에 교수에게 딴죽을 걸고,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맥주를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리몰드 광장 12번지, 수없이 뛰쳐나왔었고 이제는 영영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해왔던 그곳에 결코 다시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의 부모에게 남은 것이 이제 그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리무스였다. 레귤러스의 죽음이 남기고 간 타격이 그렇게 컸느냐고 한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무수히 되뇌었듯이 그들은, 기실 이제 와 리무스가 레귤러스의 속내까지 뭉뚱그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어디까지나 리무스 일방(一方)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서로에게 타자로 분류되는 관계였다. 그것은 몇 시간을 함께 보냈을 뿐인 하루에 의해 쉽사리 바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무스의 생활은 크게 바뀌었다. 단언컨대 그의 생은 레귤러스가 죽기 전과 죽은 후로 나뉜다고 말할 수조차 있을 것이다.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가.
아니지. 리무스는 고개를 흔들며 정정했다.
‘그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레귤러스 블랙의 유령이.
20121031. To be cont.
* 下로 끝낼...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