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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러렐

* 원작 존중 미역국에 말아 먹은 캐붕

* 곁다리로 고드로웨

* 이제 귀찮아서 안 접슴 편집도 음슴 스크롤에 죽어보자

* 하지만 그 전에 기존 글 수정하느라 죽어나겠지

 

 

 

 

 

 

 

 

 

 

 일곱 살. 소년의 시야는 경이로운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이 아플 정도로 까마득히 달린 샹들리에의 반짝거림, 그 조명을 받아 흐드러지게 광택을 뽐내는 고풍스러운 가구와 장식들, 호화로운 접시와 그것을 가득 채운 더 찬란한 색채의 온갖 음식들, 그 다채로운 맛, 크지 않은 목소리들이 수없이 모여 만들어내는 웅성거리는 소음, 음악, 검고 희고 붉고 푸른 여인들의 드레스. 그것이 일곱 살의 살라자르 슬리데린이 처음으로 맞이한 파티였다. 고개를 빳빳이 꺾어 들고 정신없이 둘러본 탓에 목이 금세 피곤해졌다. 시야는 제 눈높이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보이는 것은 다리뿐이었다. 서 있거나 움직이는 수백 개의 다리들. 소년은 금세 지루해졌다. 금색 클러치 백을 들고 있는 어머니의 손을 힐끗 쳐다보았다. 살결은 분을 바른 비단처럼 희고 고왔다. 미동도 없는 손에서 엄숙함이 느껴졌다. 결코, 감히 그 손을 잡고 심심하다고 칭얼거릴 수는 없을 것이다. 소년은 움츠러들었다.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살라자르, 이리 와. 친구들이 있는 곳에 데려다줄게.

 살라자르는 훌쩍 터울이 진 자신의 형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고등학생인 그의 형의 보폭을 따라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들은 포도주색 카펫이 깔린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한 뼘쯤 열려있는 금동색의 문 앞에서 멈춰선 형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은 아주 작은 마찰음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열렸다. 작은 방 안에 벽난로가 타오르고 있었다.

 벽난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의자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놓인 책에 집중한 옆얼굴이 단정하기 그지없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 위에는 고수머리의 소년과 소녀가 마주 보고 앉아 장난감을 만지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만지고 있는 것도 떠들고 있는 것도 소년 쪽이었고 소녀는 짤막한 맞장구를 제외하고는 그저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소녀의 얼굴에서 지루해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부르러 올 때까지 얌전히 있어.”

  

  

 살라자르는 등을 가볍게 누르는 손길에 의해 몇 발짝 떠밀려 들어갔다.

 매번 누군가의 손이 소년을 이끌었고, 낯선 얼굴과 이름들을 소년의 기억에 우겨넣었다. 백지와 같았던 어린 세계는 금세 타인의 필요에 의해 골라진 목록으로 착실하게 채워졌다. 소년은 스스로 다가가는 것을 할 줄 몰랐다. 그래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때와는 달리 소년의 형은 방 안에 있는 아이들의 이름을 소년의 귓가에 속삭여주지 않았다.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형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다.

 살라자르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문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정신없이 떠드는 소년의 말에 고개를 까닥거리면서 방글방글 웃고 있던 소녀였다.

  

  

 “안녕!”

  

  

 소녀의 인사에 반응한 다른 둘이 고개를 반짝 들었을 때, 소녀는 이미 살라자르의 앞까지 달려와 생글거리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살라자르는 머뭇거리며 마주잡았다. 그 손은 그때껏 잡아왔던 다른 손들보다 훨씬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벽난로의 열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그것이 헬가 후플푸프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리고 고드릭 그리핀도르, 로웨나 래번클로와의 첫 만남이기도 했다.

  

  

 “친구들은 어땠어?”

  

  

 그날 저녁 그의 형이 질문을 던졌을 때 어린 살라자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구’라는 말의 정의는 소년에게 잘 와 닿지 않았다. 가까운 사람? 좋아하는 사람? 하지만 무엇이 가깝고 좋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소년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단지 사자 갈기처럼 정신없는 붉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쉴 새 없이 떠들기를 좋아한다는 것, 벽난로 앞에 앉아 있던 소녀가 아주 똑똑하다는 것, 자신에게 달려와 인사한 소녀의 목소리가 구슬을 굴리는 것처럼 말갛던 것을 기억할 뿐이었다.

  

  

 “……잘 모르겠어.”

 “그러면 안 되지. 잘 기억해둬야 돼. 그 애들은 앞으로 네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거거든. 그리고 넌 거기 있던 두 여자애 중 하나와 결혼을 할지도 몰라.”

  

  

 살라자르는 깜짝 놀랐다. 그건 친구보다 더 어렵고 까마득한 낱말이었다.

  

  

 “말도 안 돼.”

 “시간이 지나면 이해하게 될 거야.”

  

  

 그 말만 뱉고 형은 몸을 돌려 나갔다. 그는 언제나 최소치 이상의 친절을 베푸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살라자르는 형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모였던 네 명은 굴지의 대기업인 그리핀도르, 래번클로, 후플푸프, 슬리데린의 2세들이었다. 그러니까 그 날 그에게 세 명의 ‘친구’가 생긴 것은 살라자르의 다른 모든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다분히 의도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라자르는 만약 자신에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이 있다면 그 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슬리데린의 차남이라는 지위는 동급생들과 어울릴 때에도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냈다. 살라자르는 필요 이상으로 오만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의 오만함은 타고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노력은 그를 언제나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핀도르, 래번클로, 후플푸프와 있을 때 살라자르 슬리데린은 얼마든지 오만해질 수 있었다. 그들 모두는 서로의 앞에서 겸손할 필요가 없었다. 네 사람 사이에서 누군가의 정당한 우월감은 결코 다른 누군가의 열등감을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라자르는 친구의 정의에 새로운 항목을 추가했다. 동등함. 그들은 승마와 펜싱, 전날 저녁에 먹은 프랑스 요리, 브라이튼의 별장, 새로 맞춘 최고급 정장의 불편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화제가 주식, 전쟁, 정치, 사업과 같은 것들로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살라자르에게 그들이 경쟁 상대가 되는 것은 여전히 그다지 실감나지도 않는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졌다.

 살라자르는 그들과 있을 때에는 온전한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금동색 문. 벽난로, 발치에서 부드럽게 눕는 카펫의 털, 어지러이 널린 장난감, 여섯 개의 눈동자, 작고 따뜻한 손. 기억은 하나의 총체적인 심상처럼 그의 심층에 자리 잡았다. 그들이 어느 곳에 있건 간에 살라자르는 때때로 세 사람의 모습에서 옛 기억을 떠올렸고 그럴 때면 언제나 희미한, 살라자르 자신도 알아차리기 힘든 유쾌함과 안온함이 따라왔다. 그것은 살라자르가 모르는 친구의 정의였다. 즐거움. 편안함.

 헬가에게는 독특한 버릇이 있었다. 그녀는 가까운 사람들의 이름을 모조리 줄여 불렀다. 그것도 꼭 자신만이 쓰는 이름으로. 어렸을 때부터 그녀를 보살핀 수행원 겸 운전기사의 이름은 에드워드였다. 그녀는 그를 워디라고 불렀다. 릭이라고 부르면 고드릭은 재미있어했고, 로웨나는 자신이 로위로 불리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으며, 살라자르는 처음 살리라고 불렸을 때 진저리를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라자르는 그 독특한 애정표현의 방식 때문에 헬가에게 조금 더 주목하게 되었다. 그는 로웨나가 자신과 비슷하다는 것과 고드릭이 자신과 정반대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헬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해도 좋았다.

 어느 날 로웨나가 헬가에게 물었다. 고드릭과 살라자르는 이미 같은 질문에 대해 각자의 답을 내놓은 상태였다.

  

  

 “기업을 물려받으면 하고 싶은 사업이 있어?”

 “고아원을 더 짓고 싶어.”

 “……그게 다야?”

 “그럴 리가!”

  

  

 헬가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낭랑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살라자르는 자신의 저택 응접실에 있는 한 쌍의 문조를 떠올렸다. 어련하겠냐는 표정으로 눈알을 굴리는 고드릭에 아랑곳 않고 헬가는 마치 눈앞에 램프의 요정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들뜬 얼굴로 재잘거렸다.

  

  

 “가능만 하다면 장애인을 위한 학교랑,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어린이 공원이랑, 미혼모를 도와주는 시설이랑 그리고, 맞아! 안내견을 훈련하는 훈련소를 꼭 만들고 싶었지. 내가 어렸을 때 식당에서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만났는데……”

 “헬가, 헬가. 거기까지. 어쨌든 네가 뭘 원하는지는 우리 모두 충분히 알았으니까.”

 “근데 그걸 보통 사업이라고 부르진 않지?”

  

  

 고드릭의 질문에 로웨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살라자르는 여전히 문조를 생각하고 있었다. 헬가가 그에게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인 것은 그녀가 살라자르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존재보다는 새를 더 닮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

  

  

  

 댄스파티가 열렸다. 조금 더 특별한 하루였다. 그들 네 사람이 어린아이가 아닌 성인으로서 처음 참석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파티는 래번클로의 저택에서 열렸다. 로웨나는 후플푸프 가에 전화를 걸어 파티가 열리기 하루 전날 헬가를 보내줄 것을 청했다. 종종 있어온 일이지만 로웨나가 헬가의 어머니에게 직접 전화를 했기 때문에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헬가는 이유 없이 긴장한 채 래번클로 저택에 도착했고, 도착하자마자 로웨나의 손에 끌려 방으로 들어가 무어라 말할 사이도 없이 줄자로 치수를 재이고 자신이 갖고 온 것과 로웨나가 갖고 있는 것을 합해 백여 벌에 달하는 드레스를 입어보는 동시에 온갖 장식을 머리에 올려놓는 수난을 겪었다. 이 모든 과정을 로웨나는 마치 감정사처럼 분석적이고 냉정한 ─ 헬가에게는 냉혹하게까지 보였던 ─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이 반질반질해질 때까지 팩을 한 후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헬가의 눈 밑에 진 짙은 그늘 때문에 래번클로 저택의 3층 한곳에서는 다시 한 차례 가벼운 난리가 일었다.

 고드릭과 살라자르는 해가 저물어갈 무렵 도착했다. 파티가 시작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고, 그들은 언제나처럼 넷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간이 되면 함께 내려가서 얼굴을 비출 생각이었다. 그러나 고드릭이 로웨나의 방문을 두드리는 순간 반가운 인사 대신 냉랭하기 그지없는 로웨나의 목소리가 그들을 맞이했다.

  

  

 “들어오지 마. 밖에서 기다려.”

 “릭! 살리! 나 좀 살려──”

 “입 다물고 팔 들어, 헬가. 등을 곧게 펴고! 그렇지. 오, 입술은 그렇게 다물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겠어? 립스틱이 자꾸 번지잖아.”

  

  

 립스틱이라고? 고드릭이 뻐끔거렸다. 살라자르는 대꾸 대신 눈썹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그는 조금 초조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입술이 안으로 말려들어갈 정도로 꾹 다물었다. 로웨나가 하지 말라고 한 동작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헬가의 버릇이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살라자르의 버릇도 되어 있었다.

 헬가가 불평하는 소리는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로웨나의 목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문 너머의 목소리는 투덜거릴 때조차 지저귐 같았다. 차분한 로웨나의 말씨와 대조를 이룰 때면 그 낭랑함은 더욱 도드라졌다. 살라자르는 치켜들었던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지루해진 고드릭이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을 때, 마침내 문이 열렸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입을 떡 벌렸다.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고드릭의 입이 살라자르의 그것보다 세 배쯤 더 벌어져 있었지만 어쨌거나 둘은 표정을 통해 놀라움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었고 그들의 반응은 로웨나를 만족시켰다. 쇄골을 드러낸 로웨나의 푸른색 비로드 드레스는 이미 완연히 여체의 태를 갖춘 상반신과 허리선을 고스란히 살리다 골반 아래서부터 우아하게 물결치는 시폰 자락으로 변모하며 우아함을 뽐내고 있었다. 옆머리를 땋아 묶은 하프 업 스타일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새하얀 맨 어깨를 가로질러 늘씬한 등뼈 한가운데에서 찰랑거렸다. 로웨나는 여전히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고드릭을 향해 눈꼬리에 살짝 힘을 주었다. 고드릭은 마치 로봇처럼 움직이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사람이 걸음을 떼어놓자 자연스럽게 헬가를 에스코트할 상황에 놓인 살라자르 역시 정신을 차렸다. 발등을 덮는 로웨나의 드레스와는 달리 헬가의 호박색 드레스는 그녀의 무릎 위에서 발랄한 곡선을 그리며 풍성하게 퍼진 채 끝나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몰라도 헬가는 약간 울상을 짓고 있었다. 살라자르는 그녀가 옅게 화장을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희미하게 맡아지는 분 향기도 그러했거니와 볼에 올라있는 홍조나 평소보다 조금 더 붉은 입술. 살라자르는 공연히 제 입술을 한 번 잘근거리고는 그녀의 입술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헬가는 구불거리는 자신의 밝은 붉은색 머리카락을 특별히 모양내는 법이 없었기에 늘 풀어진 머리만 보던 살라자르에게 헬가의 틀어 올린 머리는 대단히 새로운 광경이었다. 머리보다도 그 아래 드러난, 그로서는 처음으로 보는 목덜미의 맨살과 어깨까지 이어지는 부드러운 곡선 같은 것들이.

 헬가는 항상 생글거리는 웃음을 만면에 띠었고, 언제나 기쁨과 에너지에 가득 차 있었다. 동적이고 뜨거운 고드릭과는 조금 다른 정적이고 따뜻한 에너지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살라자르는 손에 잡은 헬가의 손의 온도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헬가가 이완이라면 지금의 헬가는 수축이었다. 완벽하게 수축된 상태였다. 빳빳하게 굳어 있는 헬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살라자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살라자르가 취하기에는 지나치게 상냥하고 친밀한 행동이었다. 그는 언제나 헬가에게는 어느 정도의 심적 거리를 두고 있었다. 헬가가 누군가에게 거리를 두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는데 그것은 헬가의, 전면에서 보았을 때에는 발랄하고 귀엽다고 할 만한 호박색 미니드레스의 등 부분이 브이 자로 훤히 파여 맨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등을 향해 반쯤 올라갔던 살라자르의 손이 황급히 내려온 것은 기실 그 때문이었다.

 홀로 내려왔을 때, 로웨나는 고드릭의 손을 놓고 빙글 몸을 돌렸다. 살라자르는 부당한 접촉을 들킨 사람처럼 잽싸게 헬가의 손을 놓았다. 거의 팽개치다시피 하는 몸짓이었지만 헬가는 그 무례함을 탓할 기운도 없어 보였다. 로웨나는 혀를 차고는 헬가에게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린 후플푸프 부부께 인사를 드리러 갈 거야. 너흰?”

 “아까 뵈었어. 어…… 여기서 기다릴게.”

 “그래. 뭐라도 먹고 있던가. 아니면 저쪽에 체스 세트가 있어.”

  

  

 공연히 저들끼리 어줍어하던 고드릭과 살라자르에게 로웨나의 마지막 말은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로웨나와 헬가가 돌아왔을 때 고드릭과 살라자르는 옆에 음식 접시를 둔 채 체스에 몰두해 있었다. 팔짱을 낀 채 그들을 지켜보던 로웨나는 음악이 춤곡으로 바뀌자 마침내 체스 판이 놓인 탁자를 똑똑 두드렸다. 두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너희 둘은 여기서 계속 체스나 두고 있을 거야?”

 “어? 어, 어…… 뭐.”

 “그래? 그럼 우리끼리 춤추러 가자, 헬가.”

  

  

 헬가는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헬가를 아는 누가 보더라도 명백하게 그녀 일생 최대의 풀 죽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 같은 애처로운 모양새로 로웨나에게 한 팔을 잡힌 채 무도회장 한가운데로 모습을 감추었다.

 고드릭은 있는 힘껏 고개를 치켜든 채 어지럽게 섞여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서 낯익은 정수리를 찾아내느라 체스 말을 엉뚱한 곳에 내려놓았다. 살라자르는 고드릭이 패착을 깨닫기도 전에 흑색 룩의 정면으로 저를 잡아 잡수란 듯 목을 내민 백색 퀸을 냉큼 잡아버렸다.

  

  

 “체크 메이트.”

 “뭐?! 잠깐만, 내 퀸은 어디 갔어?”

  

  

 살라자르는 엄지와 검지로 퀸의 하얀 머리통을 가볍게 들어 올려 고드릭의 눈앞에서 흔들어보였다. 고드릭은 이내 상황을 깨닫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알아듣기 힘든 신음을 흘렸다.

  

  

 “으으…… 살라자르. 비록 체스는 내가 졌지만 그간의 우정을 봐서 모네는 제발 나한테 양보하면 안 될까? 그 경매 낙찰 못 받으면 아버진 날 호적에서 파낼 거야.”

 “모네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

  

  

 살라자르는 자신의 대꾸에 안도 반 의문 반의 표정을 짓는 고드릭을 향해 한층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로웨나에게 가서 춤 신청이나 해, 멍청아.”

  

  

 고드릭은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멍하니 살라자르를 쳐다보았다. 녹색의 동자를 가진 눈이 평상시의 상태보다 약 1.5배쯤 커졌을 때 그의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졌다. 머리카락만큼이나 빨갛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살라자르는 고드릭의 머리 꼭대기에서 펑 하고 연기라도 솟구치는 편이 차라리 덜 놀랍겠다고 생각했다. 고드릭은 살라자르의 말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탁자가 흔들렸다.

 살라자르는 한숨을 내쉬며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말들을 쳐다보았다. 무도회장을 향해 몇 발짝 내딛었던 고드릭이 돌연 몸을 틀어 살라자르에게로 되돌아왔을 때 살라자르는 막 체스 말들을 주워들고 상체를 펴던 중이었다. 또 뭔데? 말없이 묻는 살라자르의 눈에는 엷은 짜증이 깃들어있었지만 고드릭은 씩 웃었다.

  

  

 “너도 헬가에게 가봐.”

  

  

 그 말만을 남긴 채 고드릭은 다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살라자르는 고드릭의 악의 없는 얼굴을 떠올리고, 그가 던지고 간 말을 떠올리고, 어쩔 줄 몰라하던 헬가를 떠올렸다. 호박색의 드레스를 입은 헬가를. 틀어 올린 부드러운 붉은색의 머리와 수줍어하며 머뭇거린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 옅은 붉은색 연지를. 그리고 자신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문조처럼 재잘거리는 헬가를.

 그는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20121015. To be c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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