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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r 옹
8. 정오
다시금 시계(視界)가 정지했다. 이제는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소녀는 그래도 조금 움츠러들었다. 언제인지, 어디로부터인지 모르게 재차 출현한 청년과 그녀만이, 정지한 시공 속에서 기괴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난…… 잘 모르겠어.”
모자 장수는 흠, 하고 가볍게 콧소리를 냈다.
“다들 도망쳐버렸군.”
“응……”
침묵 속에서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년이 고개를 너무 빠르게 돌렸기 때문에, 그의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번뜩이는 것을 앨리스는 보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꽃잎 끝에서 핏방울을 떨어뜨리는 붉은 장미의 무더기를 확인한 후 다시 앨리스를 향했을 때, 모자 장수의 얼굴은 다시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고양이의 머리가 무서웠던 걸까?”
“확실히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지. 게다가 이런 일은 잘 일어나는 일이 아니거든.”
“그야, 나도 무섭지만……”
더욱이 그것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내 생각엔 말이지, 앨리스.”
청년은 허리를 굽혔다. 그가 카드 병사가 버리고 간 피투성이 도끼의 군데군데 긁히고 갈라진 나무자루를 집어 드는 것을 소녀는 오도카니 바라보았다. 제법 육중해 보이는 도끼를 한 손에 든 채 그는 한 손으로 모자를 고쳐 썼다. 모자에는 흐릿한 얼룩이 묻어 있었다. 새까만 천에 묻은 그 얼룩의 색깔을 소녀는 알아볼 수 없었다.
모자 장수는 그가 늘 띠고 있는 것보다 더욱 환하고 기쁨에 찬 미소를 지었다.
눈이 부셨다. 소녀는 눈을 감고 셋을 센 후 눈을 떴다.
둥글게 휘어진 색을 알 수 없는 눈. 그것이 그렇게 웃는 것이 처음이라는 것을 어느 누구도 몰랐다.
벅찬 빛에 여전히 눈을 찡그린 소녀에게로 모자 장수는 도끼를 내밀었다.
“네가 이것을 가져야 할 것 같아.”
소녀의 손이 자루를 잡았다.
*
9. 대홍수
그리하여 메시아는 곱고 가느다란 손에 쥔 낡은 도끼로, 망설임 없이 세계를 참살했다.
“저 자의 목을 쳐라!”
죽어 엎어진 왕의 몸뚱이를 걷어차며 여왕이 소리쳤을 때, 소녀의 입이 커다랗게 호선을 그렸다. 그녀는 도끼를 쥐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사뿐히 잡아 펼치며 우아한 몸짓으로 허리를 숙였다.
“분부대로.”
툭.
일그러진 얼굴을 한 여왕의 머리가 낙하하여 산산이 부서졌다.
소녀는 뒤를 돌아보았고, 그를 보았다.
‘지휘자’는 만족스러워 보였지만 어딘가 힘에 부쳐하는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깃든 연민, 그녀는 그것이 연민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지만, 어찌되었건 무언가 어그러져 있다는 것을 느낀 앨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창백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
10. 수평선
“이제 그를 죽여야 해.”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채로, 소녀는 천진한 얼굴로 물어왔다.
“누가 또 있어?”
“응. 딱 하나가 남았어, 앨리스.”
“어디로 가면 되는데?”
소녀의 시선을 좇아 모자 장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붉은 바다 위, 존재였던 것들의 잔해가 현란하게 펼쳐져 있는 대지. 그것은 메시아의 강림을 경축하는 제전이었고, 카니발이었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새빨간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혀와 입술, 그리고 그녀의 뺨 중 어느 것이 더 붉은지 이제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모자 장수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자각할 수 있는 것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넌 가지 않아도 돼.”
“왜?”
“내가 그를 죽여야 하거든.”
*
11. 타종(打鐘)
“너와 나, 이제 둘만 남았구나.”
“……”
미간을 굳힌 채, 모자 장수는 사이로 불어가는 비릿한 바람을 느꼈다.
“로맨틱하네.”
어린 소녀가 만들어낸 살풍경 위에 우뚝 선 3월의 토끼는 참으로 고왔다. 그것이야말로 실로 로맨틱한 그림이었다.
모자 장수는 쿵 하고 자신의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나는 선택했었어, 해터.”
저만치서 앨리스가 모자 장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3월의 토끼는 자신의 등 뒤에 있는 그녀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모자 장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모자 장수의 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어?”
3월의 토끼는 소리 내어 웃었다. 구슬처럼 울리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모자 장수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는 3월의 토끼의 어깨 너머로 동동거리는 소녀의 머리를 볼 수 있었다. 3월의 토끼는 여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모자 장수만을 보고 있었다. 꼬리가 처진 붉은 눈동자가 하늘하늘.
“해터.”
희고 부드러운 팔이 그를 향해 내밀어졌다. 모자 장수는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 손에 쥐어진 것은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었다.
“나의 파트너.”
3월의 토끼가 한 발 다가섰다. 모자 장수는 다시 한 걸음 물러났다.
“나의 연인.”
하얀 발이 단숨에 열 걸음을 내딛어 자신의 앞으로 왔을 때, 모자 장수는 더 이상 물러나지 않았다.
“앨리스.”
방아쇠가 떨렸다. 혹은 거기에 걸려 있는 손가락이 그러했던가.
“나의 앨리스.”
나긋나긋하고 희고, 붉은 두 개의 팔이 천천히 그의 목에 감겼다. 모자 장수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3월의 토끼는 마치 추워하는 것처럼 파르르 떨고 있었다. 모자 장수는 천천히 손을 앞으로 뻗었다. 구겨진 연미복의 소매가 가는 허리를 끌어안았다. 토끼의 목소리는 먹먹했다.
“사랑하는 나의 앨리스.”
연인을 품은 왼팔에 힘을 주며, 모자 장수는 오른손에 든 총구를 그의 옆구리에 깊숙이 겨누었다. 떨림이 멎었다.
3월의 토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입가에 고인 미소가 조금 슬퍼 뵈기도 해서, 모자 장수는 잠시 망설였다.
“운명의 종소리가 울렸었지.”
중얼거린 직후, 흡사 셔터가 내려가듯이 3월의 토끼의 얼굴 위로 무언가 투명한 것이 좌르르 쏟아지는 것을 모자 장수는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대단원의 막이었다. 보이지 않는 가면이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3월의 미친 토끼가 태초부터 지니고 난 본래의 얼굴이었다! 가면은 상냥했었고 덧씌워진 맨얼굴은 무시무시했다. 새빨간 입술은 어느 사이엔가 분명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모자 장수는 눈을 부릅떴다. 튀어나올 기세로, 멈추지 않고 커져가기만 하는 그의 눈을 보며 3월의 토끼는 차갑고, 잔혹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새하얀 만면에 머금었다.
“그래서 그의 머리는 땅바닥을 굴렀어. 닳고 닳아 없어질 때까지.”
“……빌어먹을!”
3월의 토끼의 분홍빛 눈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아마도 모자 장수가 그토록 거친 말을 내뱉은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자 장수는 그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먹다 버린 사과 빛깔의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은 겁에 질려 있었다.
별안간 청년이, 그를 품은 눈동자가, 그것을 품은 3월의 토끼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얼음처럼 타오르는 그 입술을 자신의 입술 위로 느끼는 것과 거의 동시에 모자 장수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비릿한 맛이 났다.
*
12. 성찬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동그란 구두코가 그의 앞에 와 멈추었다. 피웅덩이 위에 주저앉아 있던 모자 장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앨리스는 활짝 웃고 있었다. 모자 장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무래도 소녀만큼은 못했지만 그는 어찌어찌 엷은 미소로 그녀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도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고마워.”라고 속삭였다. 소녀는, 그녀의 전신이 그러하듯 뺨에도 검붉고 찐득한 액체를 잔뜩 묻히고 있었다. 모자 장수는 불현듯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물질인가를 상기했다. 그는 그것을 지워주고 싶었고 그래서 화약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손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살집이 거의 없이 길고 곧은 그의 손가락을 3월의 토끼는 몹시 좋아했었다.
모자 장수는 손으로 소녀의 볼을 감싼 후 가볍게 문질렀다. 거무죽죽한 핏자국이 지워지고 그 자리에 새롭게 채색된 것은 갓 흘린, 아직 식지 않은 새롭고 산뜻한 빨강이었다.
모자 장수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는 자신의 손길을 따라 고스란히 그려진 선명한 색채의 무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재차 소녀의 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3월의 토끼가 좋아했던 그 손가락으로, 다시 한 번 소녀의 얼굴을 쓰다듬──
──는 순간, 우지직 소리를 내며 소녀의 바다색 눈동자가 부서졌다. 피가 처음에는 튀었고, 다음에는 분수처럼 솟구쳤다. 모자 장수는 소스라치며 뒤로 물러섰다. 핏방울이 튄 눈이 불에 덴 듯 아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
수천 마리의 벌레가 동시에 나무를 갉아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문드러진 살빛 덩어리를 주렁주렁 매단 채, 달그락거리는 소녀의 턱뼈가 고함을 질렀다.
“자아,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
말이 거대한 어둠처럼 자신의 목을 움켜잡는 것을 느끼며, 모자 장수는 심장의 고동에 맞추어 터져 나올 듯 박동하는 자신의 눈을 움켜쥐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폭신하게 와 닿는, 너무나도 낯익은 감촉이었다.
“……!”
“왜 그래, 해터?”
뱃속에서 갓 나온 태아처럼 모자 장수는 뻣뻣이 경직했다.
“먹을 걸 앞에 두고 졸다니, 나이가 들었군.”
자신의 말을 듣고 배가 터질 듯 웃어대던 거위가 의자에서 떨어져 목이 부러지는 것을 힐끗 쳐다본 후 체셔 고양이는,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는 눈앞의 풍경에 여전히 얼떨떨해 있는 모자 장수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윙크를 선사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체셔 고양이는, 어찌나 수줍어했던지 볼이 발갛게 물든, 눈이 없는 소녀의 머리를 냉큼 삼켜버렸다. 그러고는 보이지 않는 앞발로 보이지 않는 배를 문지르며 덧붙였다.
“오늘은 꽤 맛이 좋아.”
혹은 문지르는 것 같았거나, 문질렀을지도 모른다. 아무려면 어떠한가.
050518. Fin. BGM : Raven (Do As Infinity)
120829. Edit. BGM : Splendide Dreams (Workspace / Ragnarok Online)
* 해터헤어인지 헤어해터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