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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r 옹

 

 

 

 

 

 

 

 

 

 

 6. 메시아!

 

 

 “앨리스가 온다.”

 

 꿈꾸는 쥐 역의 난쟁이 사내가 쥐색 털가죽을 뒤집어쓴 채 조용히 식탁 위에 웅크렸다. 모든 것은 자연스러웠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먹다 버린 앨리스가 자연스럽게 미친 모자 장수가 되었던 것처럼.

 

 “‘그들은 긷는 법을 배우고 있었지.’”

 

 난쟁이 사내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하품을 했다. 그의 하품이 전염된 탓인지, 366번째의 앨리스는 지루한 표정을 지은 채 주먹손으로 연신 눈을 비벼댔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것들을 길어 올렸지.’”

 

 루나시는 안절부절못하며 어쩐지 맥이 빠져 있는 다과회를 지켜보았다. 고장 난 테이프가 느리게 돌아가는 것 같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이 그녀를 그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묶어두고 있었다. 필경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눈앞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비극의 주인공이 그러하듯이.

 

 “엠으로 시작하는…… 모든…… 엠……”

 

 달칵 하고 테이프가 멈추는 소리라도 났더라면. 그러고선 그녀 자신도 함께 멎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이다. 별안간 탁자에 고개를 떨어뜨린 쥐 가죽 사내와 3월의 토끼, 그리고 무미건조한 눈길을 자신에게로 향한 모자 장수를 보는 순간, 루나시의 심장이 아플 정도로 세차게 내려앉았다.

 

 “──!”

 

 비명이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반만 땋은 머리를 한 소녀는 모자 장수의 시선 끝에서 얼어붙었다. 모자 장수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녀로부터 고개를 돌렸을 때, 모자 장수의 표정은 조금 서글퍼보였다.

 

 “도망쳤더라면 좋았을 텐데.”

 “응?”

 

 나지막한 읊조림에 퍼뜩 정신을 차린 앨리스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물었을 때 루나시는 이미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일곱 개의 구멍에서 흘러나온 진득한 액체가 흘러 땅으로 스며들고 수풀의 뿌리를 적셨다. 모자 장수는 식어버린 홍차를 바닥에 붓고 새로 차를 따랐다. 향긋하고 쌉쌀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비린내를 덮어버릴 정도로 충분히 짙게.

 

 “다들 잠들어버렸어, 앨리스.”

 “정말이네.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는데.”

 “너는 정말 상냥하구나.”

 

 모자 장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앨리스는 볼을 물들이며 배시시 웃었다.

 

 “그러니,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부탁?”

 

 동그래진 두 눈이 소녀답게 귀여웠다. 모자 장수는 회고했다. 자신도 분명히 어느 날엔가는 저러했었을 것이라고.

 

 “내 부탁인 동시에 네가 집으로 돌아가는 데에 있어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도 할 수 있지. 이런 걸 ‘누이 좋고 매부 좋다’고 말하는 거야.”

 “으응. 그게 뭔데?”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짧은 뜸을 들인 후, 모자 장수는 흡족한 미소를 애써 감추지 않은 채 앨리스를 향해 몸을 굽혔다. 뎅그렁. 입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어디에선가 종이 울렸다.

 너울거리는 사막처럼, 그의 목소리는 메마르고 갈라졌지만 웃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죽여, 앨리스. 여왕을.”

 

 파아란 눈동자가 더욱 커다래졌다. 소녀는 그것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전부를.”

 

 툭. 창백하고 신경질적인 손가락이 소녀의 등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러나 마치 강한 힘에 떠밀리기라도 한 것처럼 앨리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소녀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달음질쳐 사라져갔다. 모자 장수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앨리스의 시간을 멈추는 모래시계였다. 붉고 푸르고 노란 삼만 개의 모래알들을 들여다보다, 그는 그것을 보물처럼 쓰다듬은 후 다시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독백.

 

 “누구도 너를 멈출 수 없을 거란다, 나의 메시아.”

 

 3월의 토끼와 난쟁이가 부스스 깨어난 것은 그 직후였다.

 

 “이런…… 또 졸았나 보군. 매번 지루하기 짝이 없다니까. 알파벳이라도 바꿔주면 좋을 텐데 말이야.”

 

 구겨진 털가죽을 벗어들며 난쟁이가 투덜거렸다.

 

 “해터, 앨리스는?”

 “‘다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3월의 토끼는 잉크가 번져 가장자리까지 흘러나온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갸울였다. 그의 모습이 사뭇 귀여워,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가를 알면서도 모자 장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다시 한 번, 3월의 토끼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붉은 눈이 빠르게 깜박이고, 가늘어졌다 커지기를 반복했다.

 사락사락.

 어디선가 모래알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에 메시아는, 숲 속으로 난 가늘고 반짝거리는 예쁜 길을 따라 달려갔다. 달음박질쳐간 곳의 끝에는 나무에 달린 크고 멋진 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단숨에 문을 열어젖혔고, 흰 장미들이 어지러이 만개한 여왕의 정원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몸이 휘청이리만치 갑작스럽게 그녀가 제자리에 멈추어 섰을 때, 그녀의 눈앞에서 희뜩한 무언가가 팔랑거리며 내려앉고 있었다. 유령처럼 갑작스러우면서도 천천히 날아들던 그것은, 다음 순간 힘을 잃은 것처럼 땅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소녀는 허리를 굽혀, 한 발짝만 더 나아갔으면 자신의 목을 그어 내렸을지도 모르는 얄팍한 물체를 집어 들었다. 무언가에 의해 날카롭게 베인 것 같은 조각의 단면에 손이 닿자, 얼어붙는 듯한 느낌과 함께 새빨간 액체가 맞닿은 면을 따라 점점이 번져나갔다.

 

 “아얏.”

 

 화들짝 놀라 손에 쥐었던 것을 던져버리고 손가락을 쥔 채 발을 동동 구르다, 소녀는 문득 깨달았다.

 

 “내 피가 아니네.”

 

 멋쩍은 웃음과 동시에 소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카드?”

 

 반으로 토막 난 스페이드 에이스가 그녀를 향해 소박한 윙크를 보냈지만, 친애가 가득 담긴 그 메시지는 바야흐로 위대한 등장에 의해 묻혀버렸다.

 

 “저 자의 목을 베어버려라!”

 “어……?”

 

 동그마니 선 소녀와, 그 시선 끝에 여──

 별안간 세계가 정지했다.

 소녀의 눈앞에서.

 

 

 *

 

 

 7. 사형

 

 

 “아닙니다, 여왕님.”

 

 아무도 보지 못한 곳에서 불쑥 나타난 청년은, 머리 위에 엉거주춤 서있는 모자를 과장된 몸짓으로 벗은 후 모여 있는 이들을 향해 고개가 땅에 닿도록 깊이 숙여 인사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앨리스는 그를 어디에선가 만난 적이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나 도통 어디에서 보았는가 생각이 나질 않아 그녀는 코를 찡긋거리며 입술을 뾰족하게 모았다. 청년은 앨리스를 향해 가볍게 윙크를 한 후 모자를 다시 머리 위에 얹었다. (실로, 그 모습은 모자를 쓴다기보다 얹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어릿광대처럼 흥에 겨운 웃음을 만면에 띠운 채, 청년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여왕의 귓전에 속삭였다.

 

 “거기서는 ‘이 자는 누구냐!’라고 물으셨어야 합니다.”

 

 딱. 청년이 손가락을 퉁기는 것과 동시에 경쾌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시야가 꿀렁거렸다.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이 거꾸로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강렬한 기시감. 그러나 모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정말로 그러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 자는 누구냐!”

 “예?!”

 

 당황한 나머지 소녀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여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는지 아닌지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여왕은 지휘자의 친절한 충고를 무시한 채 두 번째로 고함을 질렀다.

 

 “이 계집애의 목을 베어버려라!”

 “말도 안 돼요!”

 

 소녀도 이번에는 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의 맥락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최소한 여왕의 명령은 소녀에게 지극히 부당한 것이었다! 그 부당함이란 지휘자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는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면, 크로켓 놀이를 시작하도록 하지.”

 

 “이 자는 누구냐!”건 “이 계집의 목을 베어버려라!”건 간에 여왕이 다시 소리치지 않는 것도 의아했거니와, 소녀는 조금 전 말을 꺼낸 왕의 소매 밑에서 회갈색 거죽만 남은 앙상한 손이 꺼덕이는 것을 보고 더욱 놀랐다. 그래서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이미 다들 홍학을 잡으러 흩어졌기 때문에 소녀의 곁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흠.”

 

 어차피 들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비명을 지르는 대신 소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홍학들이 사방에서, 금방이라도 그녀의 눈을 부리로 후벼 팔 것처럼 달려들었다. 피를 뚝뚝 흘리는 붉은 장미의 무더기까지 달려왔을 때, 소녀는 길게 한숨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여기 있는 것은 정말 싫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허공이 바짝 우그러들었고,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맥더프처럼 공간의 배를 가르고, 고양이의 둥그런 얼굴이 등장했다. ‘정말 이상한 곳이야.’ 생각하면서도, 소녀는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커다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체셔!”

 “여, 안녕.”

 

 그도 반갑게 앞발을 흔들어 보였다. 물론 편의상의 표현이다. 정확하게는 ‘흔들어 보이는 것 같았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혹은 ‘흔들어 보였을지도 모른다’고 해도 좋다. 여하튼 우리의 앨리스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즐거워 보이는군.”

 “말도 안 돼. 이러면 되겠어?”

 

 그러면서 소녀는, 반가움 때문에 둥글게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이제는 영락없이 우울하고 불안해하는 얼굴이 된 그녀를 보며 체셔 고양이는, 원래도 그런 얼굴이었지만, 씩 웃었다.

 

 “그래, 이제 어떤 기분인지 잘 알겠어. 크로켓 경기는 어때? 여왕은 크로켓을 아주 좋아하지만 솜씨는 형편없지. 너라면 그녀보다 훨씬 잘할 것 같은데.”

 “말도 말아. 저 부리들이 어쩜 그렇게 내 눈을 쪼아 먹을 듯이 달려드는지!”

 “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그건 그 녀석들 것이 아니니까.”

 “응?”

 “그렇게 되어 있거든.”

 “으응……”

 “이 자는 누구냐!”

 

 소녀는 고양이의 말뜻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지고 싶었지만, 갑작스럽게 달려든 여왕에 의해 본의 아니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소녀는 무언가 어긋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저, 그러니까…… 그는 체셔 고양이예요.”

 “고양이라고?!”

 “네. 그렇지만……”

 “‘그렇지만’이라니, 참으로 무엄하구나, 너는!”

 “아아, 정말 시끄러운 여왕이로구나. 이러니까 그녀들이 좋아하지 않는 거야. 너는 이번에도 뒤치다꺼리나 하게 생겼어.”

 

 소녀는 몹시 불경하게 들리는 고양이의 말에 대해 여왕이 화를 내지 않는 것에 매우, 매우 놀랐다. 체셔 고양이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표정은 왠지 모르게 조금 전과는 아주 다르게 느껴졌다. 앨리스의 눈에는 체셔 고양이의 눈가에 지어진 갈퀴 모양 주름 한 가닥 한 가닥에 심술이 깃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

 

 더 이상 일그러질 것도 없는 미간을 더욱 좁히며, 여왕은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앨리스와 체셔 고양이는 기다렸다. 길지 않은 숙고 끝에, 아무래도 목을 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여왕은 이렇게 외쳤다.

  

 “아무튼 이 놈의 목을 치겠다! 너, 어서 가서 목 베는 관리를 데려와!”

 

 하고, 목이 꼬여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두 마리의 홍학을 가리켰다.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를 내며 버르적거리는 홍학을 보며 소녀는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우는 것도 아닌 웃는 것도 아닌 모호한 표정을 지은 채 그들이 언제쯤 목 베는 사람을 데려올지 궁금해 했다.

 

 “우유가 담뿍 들어간 홍차가 마시고 싶군.”

 

 체셔 고양이가 중얼거렸을 때, 커다란 도끼를 짊어져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몸이 휘청거리는 사형 집행인 클로버 A가 헐떡거리며 달려오는 것이 세 사람(언제나 어쩔 수 없는 오류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의 눈에 보였다.

 

 “목 베는 사람이 도착했어.”

 

 자기도 모르게 소녀는 중얼거렸고, 다음 순간 여왕과 고양이가 사형 집행인 따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모양으로 감탄사를 내뱉는 것을 보며 옅은 후회를 느꼈다.

 

 “자, 어서 이 자의 목을 베어버려!”

 

 하면서 여왕은 고양이를 가리켰다. 소녀가 여전히 싱글거리고 있는 체셔 고양이의 보이지 않는 목이 과연 베어질까를 반신반의하며 차마 나서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리는 동안, 사형 집행인은 날이 군데군데 빠진 지저분한 도끼를 높이 쳐들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카드의 몸뚱이가 곡선을 그리며 커다랗게 휘어졌다가 펄럭, 둔탁한 소리와 함께 퍼지는 순간, 도끼가 고양이의 목을 내리쳤다.

 퍽.

 불꽃이 튀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가장 먼저 비명을 지른 것은, 가장 많은 피를 뒤집어 쓴 여왕 자신이었다.

 

 “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

 

 카드 병사들이 달려와 숨이 넘어갈 듯 비명을 질러대는 여왕을 부축해서 데려가 버렸다. 순식간에 정원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눈부신 흰 장미와 피를 흘리는 붉은 장미만이 만개한 가운데 고요에 잠겼다.

 피투성이의,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웃음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잘려진 목과 함께 앨리스는 덩그러니 남겨졌다. 그녀는 피로 칠갑을 한 자신의 상반신과 고양이의 머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비명을 지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리에서는 별 수 없이 힘이 빠져나갔다. 무릎이 절로 꺾이며 제 몸뚱이가 주저앉는 것을, 소녀는 그 누구보다도 느릿하고 분명하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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