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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전 for 옹
* 공인 커플 율리안(블랙 ♂) x 휴버트(핑크 ♂)
* 설정은 패러렐
* 어설픈 방언 주의
장이 파하고 돌아가는 길에 율은 언제나처럼 주막엘 들렀다. 장사가 잘되어 몸도 마음도 가벼운 길이었다.
“오랜만이구마.”
주모 홍화가 반가이 맞았다. 주막집을 꾸리고 있기에는 하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얼굴에 웃음꽃이 함박 핀다. 체구도 작고 앳된 얼굴에, 동그란 단발 위에 꽂은 새하얀 찔레꽃이 어울리기가 그만인 것이 딱 어린아이 모양이라지만 생긴 것과는 달리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함에 깜빡 속아 나가떨어진 뜨내기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사심 없이 수더분한 사람에겐 또 더할 나위 없이 사분사분하기도 하였는데 율을 보자마자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품새 또한 객지에 나가 있다 온 아재비를 맞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했다.
“자, 여기. 이번에는 빨간 것으로 사 와봤는데 마음에 드려나 몰라.”
허리춤을 뒤져 율은 새빨간 산다화 한 송이를 꺼냈다. 진짜 꽃송이마냥 정교하게 만들어진 머리장식이다. 홍화가 지금 꽂고 있는 찔레꽃 머리장식도 지지난 장에서 율이 사온 것이며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자색에 노오란 노리개는 율이 이곳 장에 처음으로 봇짐을 펴던 날 사들고 온 것이더랬다.
“하이고야, 내를 이래 챙기주는 건 율도령밖에 없다 안카나.”
“에이. 도령은 무슨 도령이야. 국밥이나 하나 줘, 염통 많이 알지? 아, 막걸리도!”
“알았다. 미야, 란아, 들었제―”
목소리만 들어서는 낭랑하기가 이를 데 없다. 팔랑팔랑 멀어지는 동그마한 뒷모습을 보며 율은 실소했다. 단정한 정수리에서 어느 결에 꽂았는지 산다화가 바알갛게 반짝, 웃었다. 부엌엔 잊을라 캐야 한 분이나 고개를 내민다캐도, 홍화 없인 이 주막은 안 돌아간다 앙이가. 주방일은 너희가 다 하고 홍화는 대관절 무얼 해? 하는 질문에 란이 웃으며 했던 대답이었다. 마룻상에 걸터앉아 봇짐을 내려놓고 이날까지 물건 판 돈을 머릿속으로 가만히 셈해보는데 그 사이에 내달리듯 동동걸음으로 미가 다가와 탁, 국밥 그릇을 내려놓는데 그 서슬이 사뭇 힘차면서도 국물은 한 방울도 튀지 않는다. 신기해할 겨를도 없이 수저에 김치를 마저 내려놓고 미는 쏜살같이 부엌으로 돌아가 버렸다. 장이 파할 무렵은 늘 손님으로 붐비어서, 율이 걸음을 서두른다고 서둘렀지만 이미 빈자리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면서도 율은 느긋하게 숟가락을 들었다. 허겁지겁 먹기에는 아까운 그런 맛이다. 일설에는 돼지고기가 아니라 사람고기가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얼토당토않다고 웃어넘길 그 주장은 실은 또 하나의 풍문을 근거로 한 것이었는데, 요는 이 주모 홍화로 말할 것 같으면 어느 날 홀연히 장터 입구에 나타나 주막을 차렸는데 그 뒤로 몇 년이 흐르도록 나이를 먹는 것 같기도 아니고 아니 먹는 것 같기도 한 그 묘한 외양에 도무지 어린아이라고는 할 수 없는 행동거지 하며, 필경 보통의 사람은 아닐 것이다, 라고 하는…
“겸상을 혀야겄소.”
진수성찬을 앞에 두고 불경이라지만 딴에는 제법 생각에 잠겼던 차라 율은 깜짝 놀라 엉덩이를 들썩였다. 본시 생글생글 웃는 고운 얼굴이지만 지금의 란은 손님에 치여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 본의는 아니겠지만 무뚝뚝하기 그지없었다. 이렇다 할 앞뒤 설명도 없이, 뒤늦은 막걸리 한 병을 사발과 함께 내려놓고선 란은 아까의 미보다 더 빠르게 달음박질쳐 사라졌다.
“…히야, 정신이 하나도 없네.”
놀래어 딸꾹질을 멈춘 어린아이처럼, 좀 전까지 제가 푹 빠졌던 망상은 어느새 잊은 채 율은 중얼거리며 무심결에 맞은편에 앉은 사내에게 시선을 건넸다. 치레로라도 목례 한 번 건넬 법하건만 무심히 손에 든 작은 책에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딱히 말을 건넬 구실도 없어 율은 이미 반쯤 식은 국밥, 오로지 그것 하나를 아쉬워하며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렸다. 바알간 깍두기가 수줍게 미소를 지어 보이거나 말거나 덥석 집어 정신없이 입속으로 밀어 넣기를 수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그릇은 바닥을 보였고 엷은 아쉬움에 숟가락을 내려놓고선 막걸리 한 사발, 그리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란이 놓고 간 국밥에서 희미하게 김이 피어오르고, 수저조차 들지 않은 채 연분홍빛의 머리칼을 가진 사내는 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정말 맛있게 먹는군. 그렇게 맛있나?”
“아아, 뭐야. 신참인가. 홍화네 국밥 한 번도 안 먹어봤어? 안 먹어봤으면 말을 말아.”
“내가?”
피식. 하얗고 단정한 얼굴은… 무표정하게 웃었다. 이상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밖에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어 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착각일까 싶은데, 사내는 싸느라하게 말을 이었다.
“먹을 리가 없지, 이런 걸.”
“뭐라고?”
“먹고 싶으면 먹어.”
하며 앞으로 내미는 국밥에는 온기가 남아있었다. 내가 거지냐! 외치고 싶은 마음과 공짜로 한 그릇을 더 먹을 수 있다는 생각 사이에서 율은 격심히 갈등했고, 딱히 필터 같은 것은 없는 얼굴에는 그 갈등이 고스란히 나와 사내는 처음으로 얼굴에 표정이랄 만한 것을 띠었다. 재미있는 것을 구경하듯 빙그레 웃는 얼굴이었다. 이윽고 그릇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무안함을 감추려는 듯 율이 한 마디 던질 때까지 줄곧.
“쳇. 아깝게 왜 안 먹는다는 거야. 독특한 입맛이네.”
“휴라 한다.”
입 안 가득 국밥을 넣은 채 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어 차례 대강 씹고 마시듯, 목구멍으로 훌렁 넘겨버리고 나선 율은 손을 내밀었다.
“율이야. 매 장마다 오니까, 혹시 귀이개나 효자손 같은 거, 필요하면 찾아 달라구.”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 그러다 말고 생뚱맞게 휴는 지나가던 란을 불러 세웠다.
“란.”
“와요.”
“미가 안 보이는군.”
“가아는 쫌 바빠서.”
“그래?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기다려.”
새하얀 손이 품을 뒤졌다. 그제야 휴의 옷섶에, 다음으로 옷 전체에 눈길을 준 율은 그것이 상당히 값비싼 천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고, 묵직한 돈주머니를 꺼내드는 손이 흴 뿐만 아니라 매우 곱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툭. 평상 위로 던져지는 돈주머니는 얼핏 보아도 국밥 한 그릇의 값이라기엔 지나치게 무거워보였다. 그것을 본 란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볼 언저리가 조금 붉어진 것 같기도 하여 율은 의아해졌다.
“…안 받을라 칼낀데. 도로 가져가믄 안 되겄소.”
“네가 이래라저래라 할 게 아냐. 그리고 내가 주는 것도 아니고. 본가에서 주는 것이고 내 의사와는 관계가 없다. 미에게 전하건 네가 갖건 알 바도 아니지만 이쪽으로서는 생색을 내지 않으면 곤란해.”
“보소…!”
무어라 소리치려는 란의 목소리가 흔치않게 떨렸다. 대꾸도 들으려는 기색도 없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서는 휴를, 엉겁결에 쫓아 일어서며 율은 서둘러 바랑을 뒤져 동전 서 닢을 꺼내었다. 꾹 깨문 란의 입술이 희었다. 모르긴 몰라도 왠지, 눈앞에 있는 것이 미였다면 그 입술은 더욱 희었을 것 같다고 율은 생각했다.
“어이!”
대답이 없었다. 웬 오지랖인가 싶으면서도 율은 휴의 어깨를 잡아챘다. 보기보다 다부진 어깨였지만, 잔일로 막 굵은 자신과는 다르게 어딘가 모르게 정제된 느낌의 단단함이었다.
“사정은 모르겠지만, 지금 뭔가 상황이 별로인 것 아니야?”
뿌리치고 가던 걸음 재촉할 것이라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의외로, 휴는 멈추어 선 채 물끄러미 율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깨끗한 녹색이었다. 그 안에서 일렁이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울 정도로. 그래서, 다음 말이 나왔을 때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가 있다. 생물학적으로는 미와 나의 아이지.”
“…무에야?!”
생물학이라는, 양반가 도령들이나 쓸 법한 생소한 단어는 둘째치고라도 그 내용은 대단히 충격적인 것이어서, 율은 입을 딱 벌렸다. 어깨를 쥐었던 손이 맥없이 툭, 허공으로 떨어졌다.
“주막 작부라 하여 본가에서는 어미 없는 자식으로 키우려 하더군. 그 대신 여자에게 주라고 돈을 들려준다. 하인들로는 도통 받으려 하지 않아 내가 직접 와야 했어. 골치 아픈 일이지 않아?”
“…저기, 괜찮은 거야?”
“뭐가?”
“그런 얘기, 나 같은 놈한테 막 해도 말이야.”
“그런 얘기라.”
하며 휴는 웃었다. 다시, 아까의 그 표정 없는 웃음이다. 등골이 싸늘해졌다.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음에도, 휴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굳어진 채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별스러운 이야기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거냐?”
특별히 올바르게 살아온 것은 아니다. 어쩌다 보니 한 번에 한 사람하고만 정을 통하였지만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떠도는 것이 인생인 이상 만나면 만나고 헤어지면 헤어지고, 정이란 있으면 좋지만 소중하다거나, 없으면 아쉽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몸이 멀어지면 자연스레 멀어지고, 그러면 다른 상대를 찾았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에게도 자격 같은 것은 없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은 했다. 생각은 했지만… 주먹이 먼저 나가 버린 것을 어쩌랴.
퍽.
소리와 함께 나뒹굴었다. 얼핏 몸을 보아선 책만 읽던 샌님은 아닌 것 같았지만 주먹이 날아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휴는 그대로 나뒹굴었다. 입가를 타고 느릿느릿 번지는 붉은 액체. 파랗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피는 빨갛군 그래, 씹어뱉듯 율은 중얼거렸고, 다음 순간에는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그런 말이 어딨어! 네 아이잖아!”
한동안 휴는 대답이 없었다. 맞서 덤벼든다면 한바탕 난투가 되었겠지만, 반응이 없으니 복받쳐 올랐던 율의 감정 또한 서서히 사그라졌다. 엷은 멋쩍음과 미안함이 남아, 혹여 쓸 곳 없는 무명천 부스러기나 나오지 않을까 품속을 뒤는 율이었지만 그보다 한 발 앞서 휴가 제 옷소매를 가져다 입가를 닦았다. 율로서는 취급할 일이 없어 가격도 모를 만큼 비싼 천이었지만 단박에 벌겋게 물들었다. 아깝기도 하고 죄책감도 한층 심해져 율의 어깨가 움찔 놀랐다. 한 줌의 시간이 흐르고, 엷게 한숨 같은 것이 들린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여, 율은 수그렸던 고개를 들어 휴를 보았다. 마주친 것은 분노도 미안함도 깃들지 않은 그저 순수하게 연녹색의 눈동자, 그것뿐이었다. 칼날처럼 팽팽하고 반듯하던 얼굴 근육이 조금 허물어지는 것 같더니 귀찮아하는 표정이 어렴풋이 생겨났고 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내 아이가 아니라고 한 적은 없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원했던 대답은 아니다. 무어라 반박할 말을 찾으며 끄응, 삐걱거리는 머리를 힘겹게 굴리는 율을 향해 휴가 던진 다음 말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장돌뱅이 따위나 하고 있기에는 아까운 힘인데. 다른 일 해볼 생각 없어?”
“…무에라고?”
“일 말이야. 마침 사람이 하나 필요한데.”
분위기로 보나 뭐로 보나 제법 괜찮은 집 자식인 것 같은 이가 던지는 말이니, 좀 전의 미안함도 잊고 눈이 번쩍 뜨일 수밖에 없는 율이다.
“나야 좋긴 한데. 뭘 하면 되는 거지?”
“무식하게 힘만 쓰면 돼. 지금처럼. 보수는 아깝지 않게 줄 거다.”
끝까지 정나미 떨어지는 놈, 생각하며,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 히죽 웃어 보이며 어미닭 따르는 병아리마냥 총총 휴의 뒤를 따르는 25세 청년, 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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