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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론은 당그라니 앉아 있었다. 빗소리가 사뭇 잦아들어있었다.
꽃병이 놓인 작은 원탁과 1인용 소파가 가구의 전부였다. 꽃병에 꽂힌 시든 꽃 몇 송이가 그러잖아도 휑한 거실을 더욱 살풍경하게 만들었다.
론은 병에 꽂힌 꽃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본디부터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닐 터이다. 시들고 바짝 말라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된 꽃송이는 어둠에 익숙해진 지 오래인 론의 시야에서 노르스름한 회색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론은 알고 있는 꽃의 이름들을 기억 속에서 죄다 끄집어냈다. 장미, 백합, 프리지아, 샤프란, 안개꽃…… 헤르미온느가 언젠가 말해주었던 그 꽃의 이름만이 거기에 없었다.
없었다. 그러니까 결국, 꽃은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름 없는 것이 이름을 갖기 위해서는 그저 아무 이름으로든 부르기만 하면 되었다. 론은 그 꽃을 샤프란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샤프란이 아닌 꽃은 그렇게 샤프란이 되었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존재, 이름 없는 존재가 또 하나 있었다. 아무 이름으로든 부른 것을 제 이름으로 취(取)해버린 존재가. 별안간 론은 수줍게 수그린 꽃의 모가지를 비틀어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거실에서는 아직도 갓 대패질을 한 나무 특유의 냄새가 났다. 새 집을 장만하자마자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고, 유일하게 그곳을 거처로 삼고 있는 론은 거의 집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가 그곳에서 하는 일은 오직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것 두 가지뿐이었다. 아니, 악몽을 꾸는 것까지 포함하여 세 가지.
다섯 번째로 이사한 집 부근에서 하이드로부터 습격을 받았을 때 론은 더 이상 이사를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는 해리에게 헤르미온느와 휴고를 맡기며 비밀 파수꾼이 되어줄 것을 부탁하고 자신은 그대로 본래의 집에 머물렀다. 하이드가 론을 괴롭히기 위하여 이용할 수 있는 론 자신 외의 모든 수단들로부터 스스로 격리된 것이다. 그 조치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해리는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는 짧은 말로 자신의 감상을 표현했지만, 론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하이드가 나타나는 것은 론이 혼자 있거나, 그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들과 함께 있을 때뿐이었다. 그가 보다 강력한 사람, 예를 들면 해리 같은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즉 하이드를 나타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아주 간단한 문제였다.
그리고 론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하이드가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만을 바라지 않았다. 오러들이 붙여준 이름 그대로 나타나고 숨기만을 반복하는 그 남자를, 누구보다 잡고 싶은 것이 론 자신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론이 원하는 것은 그 자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충분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었으며, 그런 후에야 비로소 그 자의 존재가 분명하게 멸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은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이유?
그가 자신을 공격하는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전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타날 테면 나타나 보라는 듯 오히려 전보다 몸을 덜 사려가며 오러 임무에 전념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한 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것은 오직 해리, 마침내 볼드모트의 손아귀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던 해리뿐이었다.
론이 원한다면 가족들을 만나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했다. 비밀 파수꾼을 맡고 있는 해리에게 요청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 만난 것은, 헤르미온느 쪽에서 론을 만나게 해주지 않으면 은신처를 뛰쳐나가버리겠노라고 오러들을 협박하고 나서였다.
넉 달 전, 론의 생일날의 일이었다.
갑자기 눈이 부셔왔다. 눈물을 흘릴 때처럼 시큰거리는 통증이 양쪽 눈 모두를 덮쳤다. 때맞추어 시야가 부옇게 안개처럼 피어올랐기 때문에, 론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울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상념을 벗 삼아 밤을 지새운 그의 눈은 느릿한 깜빡임에조차 비명을 질러댈 정도로 건조했다.
파랗게 밝아지는 창밖을 보며 그제야 론은 동이 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사실 일출로부터는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우중충하게 드리웠던 먹구름이 걷히면서 햇살이 지상을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손목시계의 바늘을 정확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빛이 거실을 채웠을 때 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이 참을 수 없이 아려왔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겨우 가누며 론은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허공 속의 한 점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익숙한 압력이 전신을 휘감을 때까지.
* * *
다섯 번째 손님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간 직후, 드레이코는 여닫힌 여파로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출입문의 유리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론 위즐리가 이마를 들이받아 박살을 내놓았던 유리창을. 론이 수면부족으로 반쯤 감긴 눈을 한 채 지팡이를 휘둘러 복구시킨 유리창은 요란스러운 무지개빛깔을 띠고 있었다.
론이 찾아온 것은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라간 론이 침대로 걸어가 풀썩 쓰러지는 것을 소리로 확인한 후 한숨을 내쉬며 드레이코는 품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그것은 물론 유리창을 본래의 투명한 무색으로 바꾸어놓기 위해서였다. 첫 손님이 찾아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창을 바꾸셨군요. 독특하네요. 품위는 좀 없지만. 그녀가 딱히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 말에 악의가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러니 마지막 말에서 드레이코의 눈썹이 꿈틀거렸던 것에는 큰 의미가 없었을 수도 있다. 실로 주문받았던 중국식 차선(茶扇)을 그녀에게 건네면서 드레이코는 단 한 순간도 미소를 풀지 않았다. 그러나 드레이코의 입가에 비로소 진짜 웃음이 떠올랐던 것은, 잰걸음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창문 너머로 내다보며, 본디 새침하리만치 하이얀 그녀의 담비 털 망토자락이 오색으로 하늘거리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
그랬다. 론은 정말로 드레이코를 찾아왔다. 그는 내키는 시간에 들이닥쳤지만, 언제가 되든지 드레이코의 가게에 손님이 한 사람도 없을 때만을 골라서 왔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거의 언제나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다섯 시간을 잔 후 일어나 씻고 가게를 나서는 론의 규칙적인 행동은 드레이코의 일상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굳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따금 오후 티타임에 2층의 테이블 위에 놓이는 찻잔이 두 개가 된다는 것 정도.
대화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있다가도 없었고, 없다가도 있었다. 끊기는 시점도 시작되는 시점도 대중없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없을 때가 더 많았다. 처음에는 밀린 근황에 관한 이야기들이 조금씩 오고갔지만, 화제는 빠른 속도로 바닥을 드러냈다. 애당초 그들은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유하거나 학창 시절의 추억담을 나눌 만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쪽도 침묵을 깨기 위해 전전긍긍하지는 않았다. 없는 이야깃거리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보다는 침묵하는 편이 편했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씩 서로에게 무언가, 예컨대 드레이코의 입장에서는 ‘그 녀석의 일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라든지, 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왜 순순히 날 도와주는 거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어질 때가 있곤 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질문을 입 밖에 내는 일은 결코 없었다.
드레이코의 입장에서 론 위즐리의 부정기적인 방문이 전혀 성가시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었으나, 어찌되었건 론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드레이코를 괴롭히지는 않는 셈이었다. 비록 드레이코가 끓인 차에 대해 밀크티가 아니라는 둥 맛이 쓰다는 둥 투덜거리는 적은 있었어도 론이 그것을 남기는 법은 없었다.
벽에 걸린 시계의 바늘은 세 시를 약간 넘긴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드레이코가 지팡이를 까닥이자 출입문에 걸린 문패의 문구가 ‘영업 중’에서 ‘자리 비움’으로 바뀌었다. 드레이코는 알록달록한 유리창에 한 차례 더, 스치듯 눈길을 던진 후 2층으로 올라갔다.
보는 것만으로도 혀가 움츠러들 정도로 진하게 우러나온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를 찻잔에 따르며 드레이코는 생각했다. 인간은 철두철미하게 환경의 동물이라고. 맹세코 이와 같은 날이 오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던 낯설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자신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적응해가고 있었다. 심지어 이 순간에, 그는 응접실 소파에 앉아 밀크티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흥.”
지팡이 끝에서 둥실 떠오른 유리병이 잔에 우유를 붓는 것을 보며, 드레이코는 나지막하게 코웃음을 쳤다.
지난번의 방문으로부터 일주일이라는 다소 긴 시일이 흐른 후 다시 찾아온 론은, 그 간격이 곧 그의 불면의 나날을 의미하는 것이었던 만큼 한층 더 처절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가게의 출입문을 들이받아 박살을 내놓고 그것을 얼토당토않은 모양새로 고쳐놓을 때까지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한편 짜증스러운 마음도 일었었다. 그러나 이봐, 위즐리! 하고 불만스런 투로 불렀을 때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린 론의 퀭한 눈에 돋은 무시무시한 핏발이 드레이코를 주춤하게 만들기에 앞서 그의 마음에 사뭇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드레이코 자신이 인정하고 말고의 여부와 무관하게 명백히 사실이었던 것이다.
드레이코의 미간이 좁아졌다. 자신의 삶에서 외형적으로 달라진 부분은 단지 붉은 머리의 숙객(宿客) 한 사람이 늘었다는 하나의 사실 뿐이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보잘것없는 사실은 그와 얽히고설킨 감정의 타래들을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불쾌함, 불편함, 놀람 등 단순하고 원초적이었던 그것들은 다시금 그로부터 기인하는 새로운 감정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냈다. 그것은 재차 드레이코를 불쾌하고 불편하고 놀랍게 만들었고…… 이하 다 카포.
멀리서 왁자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간간히 고함이 섞여드는 것으로 보아 거리 어딘가에서 다툼이 일어난 모양이었다.
아득한 소음에 불현듯 드레이코는 그 날을 떠올렸다. 저 아래, 길 한복판에 위태롭게 선 론을 처음 보았던 날을.
차고 마른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에 부대끼던 코트 자락,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그 자신이 또한 드레이코 말포이의 생에 불어 닥친 한 줄기 바람이었다. 거센 돌풍이기보다 살랑살랑, 끈덕지게 살갗을 간질이는.
고운 김이 피어오르는 밀크티와 함께 상념을 테이블 위에 내려둔 채 드레이코는 거리로 나왔다. 오랜만에 햇볕 아래 드러난 녹턴 앨리는 며칠 동안 여름비에 시달릴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우중충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드레이코는 성큼성큼 거리를 가로지르며, 머릿속으로는 들러야 할 곳의 목록을 떠올렸다. 항상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중국인 마법사의 도매상에 들러 새로 나온 상품들을 둘러보고, 다리가 아파서 가게로 찾아올 수 없는 늙은 마녀의 집에 들러 물건을 배달하고, 그녀에게 받은 상품 대금을 녹턴 앨리의 환전소에 가져가 마법부에서 추적할 수 없는 화폐로 바꾼 후…… 마법부, 추적, 론 위즐리. 제기랄.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드레이코는 어느 사이엔가 터무니없이 느려져있던 걸음을 재촉했다. 구두코끝으로 노면에 고인 빗물을 튀기는 그의 발길은 그 후로도 몇 번인가 느려지다 빨라지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제 의지와 무관하게 어느 이름을 떠올린 것이 분명한 드레이코는 머리를 흔들며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 * *
눈을 떴을 때 사방은 온통 새하얬다.
그것은 자신을 감싸고 있는 침구의 색채이기도 했고, 빛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렇게나 밝은데도 털끝만치의 미련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개운한 숙면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론은 바로 침대에서 나오는 대신 누운 자세 그대로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렸다. 서늘할 정도로 성근 리넨이었으나 까칠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이런 이불이 있다면 어디에서든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잠깐이나마 생각했을 만큼.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에는 그것이 터무니없는 착각임에 생각이 미치어 더욱 서글퍼졌고, 그와 동시에 자신을 그다지 반기고 있지 않을 상대의 집에서 이렇다 할 대가도 치르지 않고 폐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론은 용수철이 튕기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디에선가 달착지근한 냄새가 풍겨와 그의 빈 속을 뒤집어놓았다. 그 냄새는 처음에는 아주 멀리에서 나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다음 순간에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맡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블라인드를 들추고 나온 론은 겨울보다는 사뭇 나아진, 그러나 누군가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여전히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걸음걸이로 욕실로 향했다. 드레이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1층 카운터에 홀로 턱을 괴고 앉아 책을 읽고 있거나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라고 론은 생각했다.
론은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세면대에 고개를 박고 헛구역질을 했다. 목구멍으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시큼하고 텁텁한 냄새를 그는 능숙하게 게워내 뱉었고, 수도꼭지에서 자동으로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두개골이 쨍하게 울려올 만큼 차디찬 물을 받아 머리와 목에 끼얹은 후 론은 욕실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익숙해질 법하건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서로 다른 색의 눈을 가진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불꽃 같은 머리카락을, 백토 같은 뺨을, 마른나무(枯木)의 껍질 같은 입술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쥔 론이 거실로 나왔을 때 비로소 그의 눈에 테이블 위에 놓인, 옅게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 찻잔이 들어왔다. 테이블로 다가간 론은 안에 담긴 액체가 밀크티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옆에 놓인 바구니에는 스콘 두 개가 담겨져 있었다. 그는 찻잔을 집어 들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몫이라는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말포이?”
부르는 목소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크게 울려 퍼진 탓에 론은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고요한 사위 속에서 멀거니 선 채로 대답을 기다리던 론은, 마침내 이 넓은 가게 안에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혼자 있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그는 자신이 딛고 있는 공간이 더욱 낯설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토록 넓고, 정갈하고, 환한 실내에 있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크루시아투스 저주의 후유증으로 인해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엄습하는 백일몽과 두통을 몰아내기 위해 론은 끊임없이 자신을 일터로 내몰았다. 한 곳에 머물러 쉰다는 것은 사치스럽게 생각되었고 죄악감마저 느끼게 만들었지만 그보다 앞서, 쉰다는 것 자체가 결코 불가능한 일이지 않았는가 말이다.
단 한 곳에서를 제외하고.
자신이 쉴 수 있는 유일한 장소에 서 있는 론은, 그러나 자신이 그곳에 계속 머물러도 될 것인가에 대하여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잠든 사이에 드레이코가 가게를 비우고 나간 것이, 내키는 대로 머무르라는 의미인지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나가 있으라는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후자라고 확신했을 그를 망설이게 만들고 있는 것은 이 휑뎅그렁한 공간, 드레이코 말포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갑자기 터무니없이 넓게 느껴지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다독이고 있는 찻잔의 온기였다.
다소 불안정한 걸음걸이로 응접실을 배회하다, 이윽고 창가에 멈추어서며 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저것 생각하기를 포기했다는 의미의 한숨이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들고만 있던 잔을 천천히 들어 올려 안에 든 것을 한 모금 삼켰다. 액체는 여전히 적당한 따뜻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굳이 감탄할 것 없는 간단한 온도 조절 마법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론은 잠시 동안 감탄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분명치 않았지만 좌우간 그는 폐를 끼치고 있다는 자각은 갖고 있었다. 그 자각은 가끔은 드레이코 말포이의 알 수 없는 자비로움에 대한 의문을 낳기도 했지만 대개는 하나의 결론, 즉 론 위즐리의 이기심에 대한 혐오감으로 이어졌다. 깃털 베개가 푹신하면 푹신할수록, 탁자 위에 놓인 차의 맛이 훌륭하면 훌륭할수록, 자괴감은 그에 비례하여 차근차근 깊어졌다.
론은 자신이 과분한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만약 다른 누군가, 이를테면 해리나 가족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이었다면 론은 기꺼이 그 평화가 깨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은 드레이코 말포이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평화였다. 그것은 결코 깨어져서는 안 되었다. 드레이코 말포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론 자신을 위해서. 무엇도 남기지 않고,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그들 사이가 본래 그러했던 것처럼, 언제든지 깨끗하게 돌아갈 수 있기 위해서.
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얼마나 흉측스러운 이기심과 자가당착인지.
론은 눈을 떴다.
어찌 되었건, 단 하나의 사실만은 분명했다. 지금의 이 평온을 깨뜨릴 만한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예컨대 찻잔을 손에 쥔 채 무심코 내다본 창밖에서, 망막에 새겨진 것이나 다름없이 익숙한 어떤 사내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느낀 경악과 충격이라든지.
쨍그랑.
손에서 미끄러진 찻잔은 바닥과 부딪쳐, 요란한 파열음을 내며 조각조각 흩어졌다.
론은 주머니에서 지팡이를 꺼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레파로를 읊었다. 그러나 그는 척 보아도 몹시 비싸 보였던 찻잔의 모양새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조금 전 본 광경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순간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누구시죠?”
론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고, 눈앞에 서 있는 이를 단숨에 알아보았다. 킹스 크로스 역에서 스치듯 한 차례 보았던, 부드럽게 굽이치는 금발의 여인. 다른 곳에서 마주쳤더라면 한 눈에 알아볼 수 없었겠으나, 장소가 장소인 만큼 그녀가 말포이 가의 젊은 안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주 보고 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여인의 시선은 론의 정수리에서부터 발치까지를 빠르게, 그러나 빠짐없이 훑어 내려갔다. 목에 걸린 젖은 수건, 머리카락 끝에 맺히는 물방울, 신고 있는 실내용 슬리퍼, 그리고 기이한 모양이 되어 그의 발치에 뒹굴고 있는 찻잔과 쏟아진 밀크티 같은 것들에 그녀의 눈길이 머무를 때마다, 론은 자신의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그녀와 대치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바닥까지 내려갔던 눈동자가 다시 론의 눈을 똑바로 향했다. 론은 무심코 고개를 떨어뜨리며 그녀와 시선이 닿는 것을 피했다. 낯선 이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은 최근에,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눈이 ‘이렇게’ 된 후에 생긴 습관이었다.
여인의 눈길이 자신의 새빨간 정수리에 꽂혀 있는 것을 느끼며, 그는 다소 겸연쩍은 기분으로 엎질러진 밀크티를 향해 테르지오를 외었다. 액체는 말끔하게 사라졌지만 달콤하고 쌉쌀한 향내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렀다. 론은 한 모금밖에 마시지 못한 밀크티가 못내 아쉬웠다.
“전 당신을 알고 있어요.”
론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비록 정면으로 마주보는 것이 내키지 않아 비뚜름하게 시선을 돌린 채였지만. 아, 유명인의 숙명이란. 그는 생각했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그 소리 없는 독백은 영 유쾌하지 못했다. 재차 질문을 던진 여인의 목소리가 의구심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러가 아닌가요?”
“그런 비슷한 일도 하고 있기는 합니다, 부인.”
자리에서 일어선 론이 예의 영업용 미소와 함께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며, 딴에는 제법 장난기 어린 말투로 던진 대답에도 여인의 굳은 표정은 조금도 풀어짐이 없었다. 예상 범위 내의 반응이었기 때문에 론은 당황하지는 않았다. 다만, 역시 드레이코가 가게를 비운 것을 처음 알아차린 그 때에 나갔으면 좋았지 않았겠는가 하고 부질없이 후회할 뿐이었다.
“오러가 왜 이곳에 있는 거죠? 혹시 그이가 뭔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나요?”
이런. 론은 짧게 탄성을 질렀다. 물론 소리 내어 입 밖으로 발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생각한 것과 너무도 동떨어진 것을 말하면서도 눈썹 한 올 흐트러뜨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여자라는 존재임을 새삼 깨달은 탓이다. 아무렴, 그럴 테지. 론은 시선을 내려, 아무리 뜯어보아도 도저히 임무 중의 오러라고는 할 수 없을 자신의 행색을 내려다보았다.
론은 무어라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물론 자신과 그녀, 두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답은 진작 머릿속에 떠올라있었다. 그러나 그는 부재중인 제3자, 그러나 그들 세 사람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마지막 인물 역시 그 대답에 만족할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뇨, 부인. 저는……”
하면서도 망설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여인의 곧은 시선은 심지어 준엄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에도.
그러나 론의 걱정과는 달리 그가 길게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친구야.”
목소리는 여인의 뒤쪽에서 들려왔다.
그녀가 몸을 돌려 그쪽을 보는 것과 동시에, 론은 이제 막 그 자리에 나타난, 순간이동의 여파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드레이코를 볼 수 있었다.
“친구라고요?”
“그래. 당신도 알고 있잖아? 그는 나와 같은 학년이었어.”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며, 드레이코는 벗어든 망토를 허공에 내려놓았다. 얇은 여름용 망토는 바닥으로 떨어지는 대신 벽에 걸린 옷걸이에 얌전히 가 내려앉았다. 론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여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짧은 침묵 동안, 왠지 모르게 그의 눈앞에는 여인의 고운 눈썹이 어렴풋이 찌푸려지는 광경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이 사람이?”
한 번도 친구라고 소개한 적 없는 이가, 그리핀도르 출신의 마법사가, 오러가, 그토록 싫어하는 해리 포터의 가장 가까운 측근인 이 사람이? 그와 같은 의문들이 살뜰하게 압축된 짧은 물음이었다.
“두 번 대답해서 믿을 거라면 그냥 한 번으로 끝내지 그래? 두 번 대답해도 믿지 않을 거면 더더욱 소용없는 일이고.”
론이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을 정도로 쌀쌀맞은 대답이었다.
드레이코의 내심에 그렇게까지 거칠게 말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중국인 마법사의 상점에 도착했을 때 일주일 전에 주문해둔 프랑스제 다기는 여전히 도착해있지 않았고, 다리를 못 쓰는 늙은 마녀는 적어도 5백년은 전에 만들어졌을 중세 찻잔의 색 바란 가장자리에 대해 30분 동안 불평을 늘어놓다가 어렵게 구한 물건에 기어이 퇴짜를 놓았으며, 환전상은 보유고가 바닥이 났다며 그가 들고 간 30갈레온 중 달랑 3갈레온어치만을 환전해주었다. 그러니까 아스토리아가 끈질기게 캐묻는 것 자체가 그렇게까지 기분이 나빠질 만한 일이 아니라손 친대도, 그날 하루 겪은 일들의 총체적인 결과물로서 그토록 짜증이 뚝뚝 묻어나는 대꾸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론이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보고, 그제야 드레이코는 자신이 필요 이상으로 냉랭한 대답을 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아스토리아 또한 황당해하는 기색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것은 세 사람 모두가 그러했다.
이윽고 론은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여인의 등이 꼿꼿하게 굳었다가 약간 내려앉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찬찬히 심호흡을 한 그녀의 입에서 음량과 억양, 두 가지가 모두 지극히 절제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장에서 부엉이가 왔어요. 오늘 저녁에 들러 함께 식사를 하자는 루시우스의 편지더군요. 당신이 일찍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전하러 온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꽤나 바빠 보이니, 별장에서 만나는 편이 좋겠네요…… 늦지 않게 오길 바라요.”
마지막 문장은 드레이코의 곁을 스쳐 지나 계단으로 향하며 내뱉은 것이었지만, 그것은 계단 맞은편의 창가에 엉거주춤 선 론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그만치 그녀는 뜬금없는 드레이코의 응대로 인해 느낀 당혹감과 불쾌감을 훌륭하게 다스려냈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기로는 드레이코가 조금 더했다. 계단을 밟아 내려가는 사뿐한 발자국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마침내 달깍, 출입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쭈뼛쭈뼛 침묵이 내려앉을 때까지, 드레이코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론은 자신이 입을 여는 것과 열지 않는 것,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 중 어느 것이 드레이코의 심란한 마음 상태에 보다 덜 누를 끼칠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는 입을 열지도, 움직이지도 못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드레이코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체념하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고는 그때까지도 못 박힌 것처럼 창가에 서 있던 론을 쳐다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의 손에 들린 찻잔을 쳐다보았다.
“그 찻잔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물건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위즐리?”
선잠이 들었던 사람처럼 론은 가볍게 소스라쳤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의 손에 들린 찻잔, 그러니까 찻잔이라고 생각했던 물체가 파편들이 엉망으로 엉겨 붙어 주둥이에 손잡이가 붙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몹시 당황했다. 다기에 식견이 없는 자신이 느끼기에도, 그 찻잔에 가격표를 붙인다면 최소한 오러의 한 달 치 봉급에는 맞먹는 금액이 적히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잠깐만 기다려봐.”
하고 발치에서 뒹굴고 있는 지팡이를 허둥지둥 집어 올리는 론의 앞으로 어느 사이엔가 성큼 다가와, 드레이코는 론이 지팡이를 고쳐 쥐기도 전에 짤막하게 레파로, 하고 내뱉었다. 론이 ‘고쳐’ 놓은 것 역시 ‘손상된’ 상태로 판정이 된 모양인지, 드레이코의 주문은 제대로 작동했다. 본래의 모양으로 돌아온 찻잔을 보며 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찻잔에 네가 사용했던 주문이 레파로라면 네 마법 실력도 알만하군 그래.”
“뭐, 내 전문은 고치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부수는 일 전문이다, 그 말씀이시군.”
“말하자면.”
툭툭 내뱉는 말투는 론이 알고 있는 드레이코 그대로였다. 그 또한 왠지 모르게 론을 안심시켰기에, 론은 상대가 어이없어하는 것도 아랑곳 않고 뱅글뱅글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다 문득 조금 전의 사태에 다시 생각이 미치어, 론은 웃음을 뚝 멈추고 드레이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토록 망설였던 단어를 스스럼없이 내뱉은 그를.
“……”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본다고 네가 나처럼 레파로를 쓸 수 있게 되는 건 아닐 텐데, 위즐리.”
“그래, 그래. 나도 포기할 건 포기할 줄 알아. 그보다 뭐랄까, 좀 놀랍지 뭐야.”
“뭐가?”
“너처럼 성격 나쁜 녀석에게 그렇게 고상한 부인이 있다는 게. 내가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미인이던걸.”
“칭찬으로 듣겠어.”
“아무렴. 난 분명히 그녀를 칭찬했으니까.”
지지 않고 받아치는 론을 잠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으나, 곱게 내뱉지 않은 것은 피차일반이라 무어라 응수할 것이 없어진 드레이코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는 소파로 가 걸터앉았다. 푹신한 것에 등이 닿은 탓에, 하루 동안 쌓이고 쌓였던 피로가 순식간에 밀려와 드레이코는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았다.
“……친구란 말이지.”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는 것도 같았지만, 눈을 감고 있는 탓에 드레이코는 론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어떤 얼굴일까 하고 궁금증이 일었으나 결국 드레이코는 눈을 뜨지 않았다. 고개를 젖힌 탓에 다소 잠겨든 목소리로, 그는 최대한 무심히 들리도록 대꾸했다.
“그럼 달리 뭐라 말해? 아니면 내가 그 단어를 쓴 게 거슬린다는 뜻인가?”
“……글쎄. 어려운 질문이군.”
론의 중얼거림에, 나른하게 닫혀 있던 드레이코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려올라갔다. 드레이코는 소파에 기대었던 상체를 꼿꼿하게 일으켰다. 한 박자 늦게 쳐다본 론은 평소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약간 지쳐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현재 처해 있는 상황 탓일까, 대체로 그 표정에는 자조 섞인 웃음이 엷게 퍼져 있곤 했다. 물론 상대가 누구건 간에 우는 얼굴보다야 웃는 얼굴이 낫지 않겠는가 싶으면서도, 드레이코는 때때로 차라리 그가 울음을 터뜨리고 고함을 질렀으면 하고 바라곤 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그 황당무계한 발상의 시발점을 찾아내기 위해 잠시 동안 자아성찰에 빠져들었을 때, 크지 않은 론의 목소리가 귓전에 닿았다.
“곁에 있을 때 잘해줘.”
“갑자기 무슨 소리야?”
“부인 말이야. 그러니까, 네 가족들에게. 물론 넌 알아서 잘 하고 있겠지만.”
론의 입꼬리가 조금 전보다 선명한 웃음을 한 차례 짓고는 축 늘어졌다. 지팡이 끝으로 따뜻한 바람을 내뿜어 마르다 만 머리를 마저 말리는 손길은 어쩐지 쓸쓸하고 황망해 보여, 드레이코를 잠시 망연케 만들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려는 까슬한 말을 목구멍으로 눌러 삼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자책할 일은 아니잖아.”
때맞추어 론이 다 마른 머리를 묶느라 고개를 숙인 탓에 드레이코는 상대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없었다. 어깨를 넘긴 길이의 머리카락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동여맨 후 고개를 바로 했을 때에는, 론은 근래 보아왔던 것 중 가장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와, 설마 네가 날 위로하는 거야? 이거 고마워서 어쩌지?”
빈정대는 것은 분명했으나 한편으로는 정말로 유쾌해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발끈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드레이코는, 어차피 이제 와서 발끈한들 한 발 늦은데다가 기왕 모처럼 베푼 선처니만큼 삐딱하게 받아치는 대신 가볍게 코웃음을 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냐, 방금 고맙단 말 반쯤은 진담이라고, 말포이.”
“반씩이나? 황송하기 짝이 없군 그래.”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론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뚱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드레이코를 향해, 웃음 때문에 정확하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대강 ‘이런’이라든지 ‘미안’과 비슷하게 들리는 단어들을 너저분하게 늘어놓았다. 셔츠 목깃 언저리의 단추를 말끔히 채우고, 저만치 구석에 팽개쳐져 있던 자신의 양말을 소환 마법으로 가져와 신을 때까지도 그의 얼굴에 어린 웃음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드레이코는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론을 웃게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과 같은 웃음이라면 분명 우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생각하며 론의 뒤를 따라 계단에 발을 디뎠다.
1층으로 내려온 론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역시나, 위풍당당하게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출입문의 유리창이었다. 그는 오만상을 찌푸렸고, 마찬가지로 유리창을 보며 인상을 쓰고 있는 드레이코를 향해 물었다.
“맙소사, 말포이. 며칠 사이에 네 센스가 이렇게 엉망이 되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저 끔찍한 색깔은 도대체 뭐야?”
“하? 멀쩡한 유리를 저 꼴로 만들어놓은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뭔 소리야?”
원체 어이가 없었던 탓에 드레이코의 말문이 순간적으로 막혔다. 눈을 깜박거리며 그런 드레이코와 유리창을 번갈아 쳐다보던 론의 얼굴에 이윽고 무언가를 깨달은, 그리고 뒤이어 민망해하는 기색이 어렸다. 잠에 취해 비몽사몽이었던지라, 제가 저질러놓은 일을 바로 떠올리지 못했던 탓이다. 순간이나마 오해를 받았던 것이 억울하기도 하여 더욱 곱지 않은 표정을 지은 채 론을 노려보았는 드레이코의 시선이 영 부담스러웠던지라, 론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공연히 뒤통수를 긁적이며 주머니에서 지팡이를 꺼냈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미안. 지금 고쳐줄게.”
“네 솜씨를 다시 믿으라고? 관둬, 내가 할 테니까.”
드레이코가 의도했던 대로 자신이 찻잔에 저질렀던 참상을 떠올린 론은, 머리카락만큼 얼굴을 붉히며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빠끔거렸으나 결국은 끙 하고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말썽도 가지가지구나.”
“왜 내가 할 말을 네가 하는 거야?”
“휴, 그러게.”
“그렇게 미안하면 대가라도 제대로 치르지 그래?
바로 알아듣지 못하는 론에게, 드레이코는 한 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려 예의 삐딱한 웃음을 만들어 보이며 덧붙였다. 삐뚜름한 웃음이 된 것이, 정작 말을 꺼낸 본인이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억하심정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밥 말이다. 뻔뻔한 위즐리 같으니.”
“맞다!”
그것 보라는 듯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드레이코가 다시금 면박을 주려는 찰나, 론은 씩 웃으면서 선수를 치는 것이었다.
“조만간 꼭 해주지. 하지만 오늘은 안 돼. 너 가족들과 저녁 약속이 있잖아.”
“귀찮으면 귀찮은 거지, 핑계는.”
“핑계라니! 내가 아까도 말했잖아? 가족에게……”
“내 가정사까지 참견할 건 없어, 위즐리.”
“제발, 말포이.”
‘제발’이라는 단어를 쓴 것에 대해 놀란 드레이코가 눈썹을 치올리며 기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것도 아랑곳없이, 모르는 사람이 보았더라면 너무나도 이상스럽게 들렸을 정도로 간곡한 어조로 론은 덧붙였다.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손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면 늦는단 말이야.”
“난 잘 모르겠는데.”
“허?”
“손 안에서 빠져나가고 보니, 그게 얼마나 하찮은 것들이었는지 알게 되던걸.”
그 또한 진정이었다.
론은 바로 대꾸하는 대신 드레이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은 드레이코를 나무라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풀에 당혹스러운 기분이 되어, 드레이코는 서둘러 덧붙였다.
“내가 잃은 게 너에 비해 별 게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한참 에두른, 그러나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는 사과가 담긴 드레이코의 말에도 론은 이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드레이코가 감내할 수 있는 것보다 아주 조금 더 긴 시간 동안 침묵을 지키며 드레이코의 눈을 바라보았고, 견디다 못한 드레이코가 슬며시 눈길을 돌려 창밖 너머의 거리로 시선을 던지는 것을 보며 조용히 내뱉었다.
“너 조금 변했구나.”
“무슨 의미야?”
론은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전까지 짓고 있었던 진중한 표정은 사라지고 대신 엷은 웃음이 그 입가에 어려 있었다.
“글쎄…… 훌쩍 자란 조카를 보는 삼촌의 기분이라고나 할까.”
“뭐야, 그 얼토당토않은 비유는?”
“그러게 말이다.”
출입문이 열렸고, 닫혔다.
가게를 나서자마자 론은 순간이동으로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한 차례 돌아봄도 인사의 손짓도 없이. 무엇이 그토록 그를 서두르게 만드는지 알 것 같아, 드레이코는 공연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유리창 너머, 오색으로 일렁이는 네모난 허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윽고 문을 향해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문패의 글자가 ‘자리 비움’에서 ‘영업 중’으로 바뀌었다.
다른 하나는 끝끝내 바뀌지 않았다.
20120317. To be cont.
* 아무리 봐도 몇 줄이 막드 느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