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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봄에 씀 
* 세계관 많이 무시
* 부제 : 로미오와 줄리엣
  
  
  
  
  
  
  
  
  
  
  - 무엇을 원하는가, 말하라 동료여.
  
  
  마주선 두 그림자에서 흐르는 것은 같은 공기, 동질의 허무. 먼지조차 숨죽이며 내려앉은 방 안에서 제로스는 목을 풀 듯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까닥였다. 기꺼움에 어쩔 줄 몰라 파들거리는 미소가 드물게도 입 끝까지 걸려 있었다. 그 미소는 일렁이는 푸른 불빛 속에서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 그대는 나와 같다. 매우 즐겁군.
   
   
  허름한 고서점의 구석, 벌레의 사체 무더기 아래서 썩어가던 낡은 마법책에 쓰여 있던 악마의 소환술은 기억 속에서 낡아가고 있었다. 행동은 그저 유희였다. 간절히 바라기는 했으되, 진짜라고는 믿지 않았다.
  악마는 다른 곳에 있지 않은 것을.
  
  
  "악마란 말이지."
 
 
  하여 굳이 입 밖에 낼 필요조차 없었던 단어다. 악, 마. 입속에서 구르는 생소한 음의 나열에 나지막한 웃음이 섞여들었다.
  분명 최근에 그런 말을 들었는데. 누구였더라. 아하, 기억이 났다. 그것은 그녀다! 주인의 기질처럼 선명하고 쾌활했던 흑발과 커다랗던 눈동자.
  정의를 사랑했던,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이것은 모두 과거형의 울림이다. 제로스는 잠시 그녀를 위해 묵념했다.
  회상, #1 죽음 직전. “제로스, 당신은 악마야.” 화사하게 아름답게 번지던 붉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그것 그리고 꿈틀거리던 심장의 감촉. 정지한 눈동자. 인간의 것치고는 괜찮은 눈동자였다. 그것은 제법 중요한 지각이다. 그 전까지는 무엇보다 싫어했던 것이었으므로. 죽어가면서 또 무어라고 말했었는데. 아아. 흰 장갑에 가려진 손가락이 입술을 따라 움직였다. 도통 모르겠군요, 독백과 작은 웃음소리.
  어쨌든, 그런 것과는 상관없다. 바로 지금, 눈앞에 악마가 있다. 이 악마에게 그는 고객이기보다 ‘동료’로 느껴진 모양이다. 그 부르는 말은 예전에 붉은 머리의 한 인간이 말하던 같은 단어와는 사뭇 느낌이 달라서 제로스는 다시 한 번 웃었다. 뒤이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 얼굴 탓에 그 웃음의 끝은 조금 썼다.
   
  
  "내가 원하는 것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슴 한구석이 저려오는 것 같은 착각. 최후의 선택…… 아니, 선택 따위는 없다. 없었고, 없을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일까? 그? 혹은 나? 세계? 무엇을 떠올려도 안개가 낀 것처럼 개운치 않은 심상. 겹겹이 쌓여 벗겨도 벗겨도 진실을 알 수 없는 달콤한 기만의 파이. 제로스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나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일부러 떠올릴 필요조차 없었다. 헤어날 수 없는 환영, 가장 어두울 때조차 그 윤곽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그림자. 혀끝은 차가웠고, 눈동자는 작고 아득한 바다였다.
  찰나의 시간이 영겁처럼 흘렀다. 이대로 영원히 하나의 생각만을 하다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제로스는 상념을 털어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말했다.
  마족에게는 영혼이 없다. 해서 그는 자신의 마이너스 에너지를 제공했다. 제법 괜찮은 거래. 소망의 무게에 비하면 대가는 가슴 아플 정도로 쌌다. 소멸하지 않을 만큼의 에너지를 ‘지불’한 제로스는 상대가 사라진 후의 어두운 잔상을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흐음 하고 붕 뜬 억양의 한숨을 내쉬며 옷자락을 가볍게 털고 살짝 웃음을 띤 채, 공간 전이를 시도했다. 흐릿하게 사라지는가 싶었는데 마음과는 달리 소리 없는 비명과 함께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지면서도 떠오르는 것은 마지막으로 본 그 얼굴. 어쩔 수 없나. 너는 기어이 팔불출, 병신, 머저리인 것이다. 제로스는 자신을 향해 한껏 뒤틀린 조소를 보냈다. 지평 너머 찬란한 태양이 뜨고 가라앉아 다시금 하나의 밤이 오면 그 때는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처음’으로 돌아가 있으리라. 잠꼬대처럼 무언가를 웅얼거리며 그는 눈을 감았다. 멀리 동쪽 하늘이 느릿느릿 밝아오고 있었다. 신새벽은 싸늘했고, 빛은 너무 멀었다. 결코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을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 * *
   
   
 
  "제르! 이 녀석 정말 왜 이러냐아아."
  "여, 눈 좀 떠봐, 제르디가스."
 
 
  제르가디스다. 말하려고 했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본의 아니게 오만상을 지은 채 몸을 일으켰다. 끄으윽. 끔찍한 두통이 그대로 신음이 되어 흘러나왔다.
 
 
  "깼다, 리나.“
  “나도 알아! 어떻게 된 거야, 제르?"
 
 
  눈앞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정작 대답해야 할 대상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리나는 신경질적으로 옆에 있던 가우리를 걷어찼다. 왜 때려! 시끄러워, 해파리! 이어서 몇 마디 공격적인 대화가 오고갔다. 그 사이를 가르고 들어선 것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어조로, 언제나 그렇듯이 매우 침착하고 부드럽고 쿨하게.
  떨림이 없는 목소리, 그것은 같은 상황에 마주친 누구와도 달랐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라고? 그렇게 물으면 내가 할 말씀이 없네 그려, 제르가디스 선생.“
 
 
  리나는 팔짱을 꼈다. 말과는 다르게 별안간 고압적인 자세가 되어, 깨어난 자리에서 그대로 몸을 일으켜 구겨진 옷의 주름을 펴는 제르가디스를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내가 뭘.”
  “아멜리아는 어디다 버리고 혼자 온 거야? 아니 버리고 왔다는 사실까지 버리고 온 것 같은 얼굴이지만 말이야? 마치 가우리라도 된 것 같은 모양새라고, 너.”
  “아.” 사이를 띄운 후, 제르가디스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
  “오오. 확실해, 이건 가우리야.”
  "저기 리나 난 아까부터 듣고 있었는데 말이지, 그 말 대체 무슨 뜻……?"
 
 
  항의하는 것치고는 박력이 매우 결여된 가우리는 무시한 채로 리나는 냅다 제르가디스의 멱살을 낚아채듯 쥐었다. 이어지는 고함. 제르가디스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이렇게 화가 난 거지?
 
 
  "멍하게 풀린 그 눈! 뭔가 심각한 사태가 있었던 것이 틀림 없어! 너희 셋이서 식사 거리를 잡으러 갔다 돌아오는데 이틀이 걸렸다. 게다가 멧돼지 고기는커녕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홀연히 출현해 버린 것은 너 혼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멜리아는? 제로스는!"
  "침이 튀는데, 리나. 그리고 얼굴 굉장히 커 보인다."
 
 
  붉은 머리의 히로인은 인간으로서는 차마 짓기 어려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크게 벌렸다. 욕이라도 한바가지 퍼부어 주지 않고서는 다물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입은 그러나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곧바로 원상태로 돌아왔다. 다이나믹하군. 생각하는 제르가디스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들이댄 채 리나는 부러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자아, 그 고상하신 심미안에 더 이상의 충격이 가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말해봐. 어디서 무엇을 했고 어떻게 된 건지. 속 시원하게 말해주시라고."
  "아, 그러니까 아멜리아는,"
 
 
  제르가디스는 주먹으로 다른 쪽 손바닥을 탁 소리 나게 쳤다. 그것은 이어질 대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본인도, 물론이다.
 
 
  "죽었어."
  "그에엑?"
 
 
  이상한 효과음이로세. 작은 목소리로 가우리가 중얼거렸다. 용케 들은 리나가 힐끗 가우리를 노려보았지만 그 이상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데미지가 엄청났던 것이다. 아스트랄 리나, 제르가디스의 한 방에 녹다운.
 
 
  “제르. 내 얼굴이 지금 농담 따먹기 하자는 걸로 보여?”
  "……"
  “이건 무슨 확인 사살도 아니고. 너 말야, 너 포커 치면 잘 따겠어.”
 
 
  한편 가우리는 나름대로 고민에 빠졌다. 내가 아는 아멜리아가 둘이었던가?
 
 
  "됐어, 이런 바보 같은 짓."
 
 
  손사래를 저으며 리나는 피식 웃었다. 오래오래 시간이 흐르고 다음 순간, 붉어진 눈가에서 무언가가 언뜻 반짝였다. 고 가우리는 생각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다음 순간, 조금 떨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히 리나 인버스표라고 부르기에 손색 없는 높고 우렁찬 고함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들 하시지! 하나도 재미없거든!”
  “내가 이런 말을 왜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리나.”
 
 
  조심스럽게 골라낸 한 마디.
 
 
  “미안하다.”
  “아, 이런 개……”
 
 
  욕지거리를 하려다 말고, 터질 것 같은 답답함에 애꿎은 자신의 붉은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손은 뜨거웠다. 불타는 것처럼 온통 붉은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코스튬은 실제로 불타고 있는지도 몰랐다.
 
 
  “대체 왜 이래?!”
 
 
  제르가디스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그러나 짙고 푸른 눈동자만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는데, 어쩐지 그 차디찬 볼을 타고 얼음꽃이 피어버릴 것만 같았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두고 봐라, 단숨에 같이 울어버릴 테니까!
 
 
  “……제발, 제르. 아멜리아가 죽…… 아니, 아냐. 아멜리아 어디 있어? 내 생각엔 저 숲속의 나무들 중 하나일 것 같은데……”
  "기억이 있어. 내가 보았다."
  “꿈도 참 징하게 꾸었구나, 너. 아무리 꿈이라지만 보고 있었으면서, 지켜주지 않았단 말이야?”
  “그럴 수가 없었던 것 같아. 미안하다 리나. 왜인지 기억나지 않아.”
  “왜 그런지 알아? 그게 꿈이라서 그래.”
 
 
  그것을 끝으로 리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크고 작게, 그러나 분명히 그들 모두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리나는 온갖 싫은 감정이 섞인 말투로 제르가디스를 불렀다. 목소리는 엉망진창이고 모든 것이 유감이지만 별 수 없다. 제르. 미안해. 그런데 내가 미안할 일이던가?
 
 
  "제르."
 
 
  그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머리가 아찔해오는 것을 참으며 리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갑자기 떠오른 막연한 영상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짧은 순간 어떠한 확신 같은 것이 그녀의 심장을 강렬하게 때렸다.
 
 
  “……제로스는 어디 있지?"
 
 
  한마디라도 빼놓지 않으려는 마음에 리나는 그에게로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하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까, 조금 더 자세히, 조금 더 확실하게, 물론 정말로 사실이라면 자세하고 자시고 없이 그것은 하나의 사실, 단지 그 뿐이겠지만……
  
  
  "잘 모르겠어."
  
  
  예상하고 있었지만 허망하게도, 점점 더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대화는 흘러가는 것만 같다.
  
  
  "미안, 리나. 하나 물어볼게."
  
  
  잘도 네가 그럴 처지냐. 나는 울게 될 것만 같은데. 리나는 목구멍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것을 힘겹게 삼켰다.
  
  
  "마음대로 해, 빌어먹을."
  "제로스가 누구지?"
  
  
  흘러서, 가버렸다.
 
 
 
  * * *
 
 
 
  새까만 눈동자가 빠르게 떨었다. 안타까워라도 하는 듯 파르르 내려앉는 눈꺼풀.
  
  
  “이제 아셨으니, 화가 나십니까?”
  
  
  아멜리아는 잠시 동안 침묵을 지켰다. 폭발할 듯한 눈빛으로 자색의 심연이 서린 마족의 눈동자를 노려보았지만 그것은 잠시, 응시를 당해내지 못한 그녀의 시선은 거칠게 방향을 틀었다.
  
  
  “불쌍해요.”
  “누가?”
  “두 사람 다.”
  “저는 ‘사람’은 아닙니다. 불쌍하기는 하지만요.”
  “잘도 지껄이는군요.”
  
  
  호오. 제로스는 감탄했다. 인간으로서는 제법 길고 마족에게는 눈짓 한 차례 던질 짧은 순간 동안 보아 온 그녀로부터 최초이자, 어쩌면 마지막으로 들을 거친 말. 서릿발 같은 기백, 그렇지만 차라리 객기라 이름붙이고 싶었다. 아무려면 어떠랴. 저 당당한 여인은, 훌륭한 여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정법 과거형, ‘살아있었더라면.’ 인간의 생은 서글픈 것이다. 순간을 살아남는다면 그토록 많은 것이 바뀔 터인데. 우습게도 제로스는 연민을 느낀다. 그들은 서로에게 연민을 느낀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탐하는 것 또한 악이지요.”
  “마족에게 악덕에 관한 강의를 하시려는 겁니까, 공주님?”
  “안타깝지만, 교화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네요.”
  “현명하십니다.”
  “떨어져요, 그 사람에게서.”
  
  
  그녀는 손을 들어올렸다. 부르쥔 저 주먹이 얼마나 숱한 ‘정의’를 이 땅에 구현했던가. 손가락 한 번 튕기는 것으로 바스러질 저 주먹이.
  인간의 위대함은 무모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라 하여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제로스는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짧은 부름에 의해 마치 셔터가 내려가듯 그 웃음은 먼 저편으로 흩어졌다.
  
  
  “제로스.”
  
  
  지저귐도 바람도, 모든 것이 정지했다. 제로스는 시야가 하얗게 탈색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언제부터 깨어있었던 것인가, 그는 무엇을 들은 것인가, 나는 무슨 말을 했던가……
  형언 불가능의 수천 마디가 담겨 있을 두 개의 시선을 받으며 제르가디스는 천천히 일어섰다. 단정한 그답게 검불을 털어내고 매무새를 가다듬는 것도 잊지 않는다. 망연해있던 아멜리아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여는 순간, 참으로 듣기 좋은 울림으로 그는 말했다.
   
   
  “돌아가지, 우리.”
   
   
  언제나처럼 무심상한 모습으로 등을 돌려 먼저 걷기 시작한 그 뒷모습에, 아주 잠시나마 시선을 빼앗겼었다. 그도 잠시,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여전히 맹렬히 타오르는 소녀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찰나의 고민. 아니 선택은 없다. 제로스는 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 바람결에 그가 돌아섰다. 그 눈빛을 보지 않고도 느끼면서, 망설임 없는 손에 뜨거운 생명을, 손끝에 느껴진 직후부터 빠르게 식어간 그 생명을 잔혹하게 움켜쥐었다. 그래, 나는 악마다.
  
  
  “제로스……!”
  
  
  그런데 왜 그 순간에 당신은 그녀가 아닌 나를 불렀던가.
  
  
  
  * * *
  
  
  
  그녀는 한 모금 들이킨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제로스.”
  “예.”
  “그래서 모든 번뇌는 존재로부터 시작된다, 고들 하는 것이지.”
  “예.”
  “우리는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제로스는 고개를 들었다. 찰랑거리는 흑발의 물결 너머로부터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상냥한 인상이지만, 저 노회한 드래곤의 수장도 어렴풋이 그 무서움을 느꼈었다.
 
 
  “제라스 메탈리움에게 가서 부탁해볼까.”
  “예?”
  “너를 소멸시켜달라고.”
  “해왕님……”
  “걘 나에게 제라스 브리드를 날리겠지. 아, 알다시피 실질적인 의미는 없어. 상징적인 의미에서라는 거야. 어쨌든 그런 거지. 우리는 존재와 대립하고 있지만, 허무를 추구한다는 것 자체도 결국 존재를 기반으로 하는 하나의 집착인 것이라고. 이런 말 알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모르겠습니다. 처음 듣는 말이지만…… 그럴듯하군요.”
  “그렇지? 저 말을 생각해낸 것이 인간이라는 점은 자존심이 상하지만 뭐 어쩌겠어.”
 
 
  해왕 디프시 다루핀은 다시 찻잔을 들었다. 증오와 분노와 슬픔과 절망이 한데 어우러져 그녀의 입속으로 흘러들었다. 희미하게 사라지는 아름다운 비명, 황홀한 향기.
 
 
  “세계는 혼돈의 바다위에 세워진 지팡이를 딛고 있다.”
 
 
  제로스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혼돈, 그 하나의 단어는 언젠가 목전에서 이루어졌던 어떤 존재의 강림을 떠올리게 했다. 그 자리에 있었으나 또한 있지 않았던, 보고 있었으나 또한 보이지 않았던 ‘그것’.
  그 떨림에 아랑곳없이 낮고 부드럽게, 그녀는 홀로 읊조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영점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대립하고 있지. 존재지향적 존재와 허무지향적 존재라고나 할까. 수많은 마족들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아. 그 몸부림 자체가 허무를 향한 지향이니까. 왜 이렇게 존재에 집착하는가, 하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지. 우리는 세계를 세계답게 만들기 위한 마이너스항. 존재함으로써 무를 만들어내는……”
 
 
  해왕은 소리 내어 웃었고, 제로스도 따라 웃으며 일어섰다. 가볍게 목례하고 나오는 그의 걸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번뇌 그 자신으로 인한 번뇌가 조금 덜어졌다면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자칭인지 타칭인지 모를 일명 ‘친절한 해왕씨’로 불리는 그녀는 다섯 대마족 중 가장 대외활동이 뜸한 동시에 사색을 즐기는 마족으로도 유명했다. 화려하게 일을 벌이는 것이 취미인 마룡왕이나 명왕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떨어진다는 것이 단점이었지만(표면에 나서지 않기로는 수왕도 만만치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왕이 그 이름을 떨치는 데 크게 일조하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수신관 제로스 본인인 것이다) ‘유명한 녀석일수록 명줄이 짧다’, 즉 이름은 실속이 없다는 것이 해왕이 늘 주장하는 바이자 마족 세계에서 철저히 경험적으로 증명된 진리이므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비슷한 스타일인 수왕 그레이터 비스트 제라스 메탈리움이 그녀에 대해 갖고 있는 유일한 불만이라고 하면, 말이 조금 많다는 점일까.
 
 
  “그래. 말은 잘하지, 다루핀 녀석이야.”
  “어라, 알고 계셨네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바보 같은 시늉은 할 필요 없어. 아무튼, 너의 그 처절하고 용감무쌍한 존재에의 고민은 잠시 미루어야겠다.”
 
 
  수왕은 묻지 않는다. 탐구자로서의 정신은 결여되어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더욱 여왕답다. 오만하고 당당한 나의 왕. 언제까지고 그 곁에 머물고자 한다. 방황하는 마음, 언제쯤이면 붙들어 맬 수 있을는지.
 
 
  “무슨 일입니까?”
  “언제나 똑같지 뭐. ‘사본’의 처리. 델타 공국이다. 나머지는 알아서 찾도록.”
  “알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수왕의 모습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제로스 쪽이 움직인 것이다. 세계는 알고 보면 지극히 우스울 정도로 주관적인 상으로 발현되는 것이기에.
  아직 미약하게 남아있는 ‘후유증’으로 인해 이동은 더뎠다. 스쳐가는 영상의 가짓수가 평소보다 많다는 사실이 그 증거였다. 그는 더 짧게 더 여러 번 이동해야 했고 그 간격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마침내 깊게 숨을 내쉬며 그는 멈추어 섰다. 특유의 그, 아이같이 잔혹한 장난기가 발동했기 때문이었지만 그러니까 근본적인 원인은 ‘재충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익숙한 파동의 불안과 공포, 그리고 분노가 대기에 충만해있었다. 그것은 제로스에게는, 참으로도 반가운 에너지 그 자체.
  ‘그들’은 세일룬을 향해 걷고 있었다.
  발은 쉼 없이 무수한 걸음을 옮겼지만,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심사숙고는 결여되어 있다. 아멜리아 윌 테스라 세일룬 제2왕녀의 ‘실종’을 알리는 전령으로서의 각오 같은 것은, 맹세컨대 털끝만큼도 다져져 있지 않았다.
  아득한 절망.
  제로스는 소리 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문득 ‘그’가 입을 열었다.
 
 
  “리나.”
 
 
  벼락을 맞은 듯한 아찔함에 제로스는 비틀거렸다. 왜 이렇게 바보 같은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한 다음 순간 그는 갑작스레 무언가를 깨달았다. 소원은……
 
 
  “뭐야, 제르.”
 
 
  잘못된 것이었다!
 
 
  “정말로 세일룬으로 갈 거라면, 나는 여기서 빠지겠어.”
 
 
  멈춰선 그녀의 그림자가 파르르 떨었다.
 
 
  “그러지 마.”
  “리나.”
  “내가 알고 있는 제르가디스는 이런 녀석이 아니란 말이야. 이렇게 무책임하지 않잖아. 제발, 그러지 마 제르.”
 
 
  발갛게 부은 눈의 그녀는 어쩐지 무너지기 일보 직전처럼 보였다. 가우리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제르가디스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고, 제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어울리지 않는 꼴사나운 황망함.
 
 
  “잘 알고 있어. 나는 무책임하지 않아.”
  “그럼 입 닥치고 따라와.”
  “돌아갈 거다.”
  “뭐?”
  “그녀가 죽은 그 곳으로.”
  “닥쳐, 제르가디스.”
 
 
  단 한 번도 그렇게 불렸던 적 없는 억양의 다섯 글자 이름.
 
 
  “죽지 않았어.”
  “죽었어.”
  “아니야!”
  “내 눈앞이었다.”
  “웃기지 마.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어. 핏자국, ……파편, 그 어떤 것도. 그리고 아무런 슬픔 괴로움 증오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제르, 넌 헛것을 보았어. 지금의 네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진실을 기억해내는 거야. 그러니까 우린 아멜리아가 죽었다고 전하기 위해 가고 있지 않아. 그 애를 찾기 위해 가고 있는 거지.”
 
 
  휘몰아치듯 찰나의 호흡도 없이 뱉어낸 말 끝에 리나는 주저앉아버렸다.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 슬픔 괴로움 증오는, 제가 남김없이 먹어치웠으니까요. 제로스는 중얼거렸다. 무표정한 얼굴에 차츰 웃음이 떠올랐다. 잔혹하리만치 환한 미소를 만면에 띤 그의 전신이 희열로 전율했다. 그건 말이지요 아주, 더없이 맛있었습니다!
  그 때였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리나를 부축하던 가우리가 고개를 든 것은.
  그의 시선은 제로스가 걸터앉은 나무를 정확히 향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느낀 순간, 뇌리를 관통하는 충격에 놀랄 틈도 없이 제로스는 황급하게 전이를 시도했다. 풍경이 바뀌었다. 지독히도 낯익은 장소, 달콤한 인력으로 그를 끌어당긴 그 나무 앞에 그는 서 있었다.
 
 
  ‘제로스, 당신은 악마야.’
 
 
  보이지 않는 혈흔으로부터, 귓전을 찢고 비명이 울렸다.
  
  
  
  * * *
  
  
  
  델타 공국 대공저의 첨탑이 눈에 들어오자 제르가디스의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귓전에 맴돌아, 마냥 그들과 함께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제르! 부르는 소리. 나중에라면 얼마든지 대답할게. 지금은, 잠시만.
  
  
  
  * * *
  
  
  
  “리나, 그만해.”
  
  
  한계라고 생각되는 순간마다 던지는 그의 한마디. 평소에 그렇게나 무게감 없기도 힘들 것이거니와, 때때로 그렇게나 강력한 존재감을 갖기도 힘들 것이다. 가장 무심한 신경을 가진 사람 그래서 가장, 흐트러짐이 없는 사람. 낮은 목소리로 가우리는 말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서도 쉬어터진 목소리로 악을 쓰던 리나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가우리의 팔 안으로 맥없이 허물어졌다.
 
  
  “그런데 제르가디스.”
 
 
  우습게도 그 순간 제르가디스는 생각했다. 실로 오랜만에 단박에 맞는 이름을 불렀군.
 
 
  “여기에 제로스가 있었어.”
  “……뭐?”
 
 
  먼저 반응한 것은 리나였다. 언제 풀이 죽어 있었냐는 듯, 엉겁결에 그 품에 안긴 꼴이 되어있던 가우리의 턱을 한 대 올려붙이는 것도 잊지 않고서는 벌떡 일어섰다.
 
 
  “빌어먹을 마족 녀석, 나와!”
  “진정해, 리나. 지금은 여기 없어. 가버렸어.”
  “하?”
  “난 잘 모르겠어. 제르가디스가 계속 모른다고 말하니까 왠지 나도 그런 사람은 잘 모르는 기분이 되어버렸었거든.”
 
 
  어련하시겠냐, 중얼거리는 리나.
 
 
  “하지만 이제 더 모르게 됐거든. 왜냐하면 제로스,”
 
 
  가우리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짧은 순간 망설였지만 누구도 그 망설임을 인지하지 못했다. 한 사람은 눈치 채기에는 너무 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무심했다.
 
 
  “아니, 관두지 뭐. 아무래도 내가 틀린 것 같아.”
 
 
  회상은 끝났다. 제르가디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제로스, 수신관, 심부름꾼 마족, 부엌쓰레기. 그 외 수많은 어떠한 단어에도 몸은 반응하지 않았다. 리나의 끈질긴 공세에 지쳐 하마터면 아아 알겠어, 그 수신관이라는 것은 수룡왕의 신관을 말하는 거지? 라고 물을 뻔하기까지 했던 그다.
  말은 그렇게 해두었지만 그는 ‘그 곳’으로 가지 않았다.
  동료, 그 멋들어진 울림.
  얼마나 슬프던가. 서로 다른 수많은 얼굴을 뭉뚱그려 이르는 무심한 낱말. 끊임없이 잃고 또 잃어야 하는 그 이름. 하나가 빠진 자리를, 언제고 누구고 와서 채울 수 있는 애달픈 집합.
  눈앞에서 피를 흩뿌리고 죽어가던 영상만이 남았을 뿐인 꺼림칙한 백지상태에 대해 의외로 체념이 빠르다는 사실에 제르가디스는 놀랐다. 그 자리를 찾아간들 별 수가 있으랴. 이렇게나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주 오랫동안, 참으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왔었던 것이다. 얼굴을 가린 복면을 새삼스럽게 여미며, 세상을 향해 복수심에 가득 찬 첫걸음을 내딛던 그 때를 제르가디스는 떠올렸다.
  그래, 그것이 ‘나’다.
  이 사무치는 빈자리도 금세 잊힐 것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단 하나.
  그 빈자리는 ‘그녀’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잃어버린 기억 속에 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핍된 것은 오직 그뿐, 자신이 자신으로서 무사히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 이상 이제 그것은 제이(第二)의 문제가 되었다.
  언제나 그래왔듯 가던 길을 걸어갈 것이다.
  망가진 몸을 되돌리기 위한 여정, 그것이 지금의 그에게는 스스로를 정의하는 핵심이었다. 야심찬 옛 왕의 지대한 관심 하에 온갖 마도서가 모여들었던 델타 공국이 그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서두름 탓인지, 발끝에 이는 모래바람이 차츰 거세어지고 있었다.
  
  
  
  * * *
  
  
  
  가우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지쳐 잠들었기 망정이지, 그가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리나가 안다면 대단히 억울했으리라.
  무심히 던진 돌멩이가 챙, 하고 호수의 살얼음을 박차고 수차례 튀어 올라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소소한 손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발군의 민첩함도 자타가 공인하는 능력이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동물적인 육감. 초인에 가까운 인식 능력.
  그는 분명히 그를 보고 있었다.
  제로스는 분명히 제르가디스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가우리는 확신했다. 제로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제르가디스를 알고 있다는 것을.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 고개를 들게 되었으며, 그 짧은 시선의 마주침에서 어떻게 그러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기야 인간이란 것이 본디 가장 불가사의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리나와 제르가디스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그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어. 라고 말한다면 모두는 놀라서 펄쩍 뛸 것이다. 하지만 눈치 채지 못하는 쪽이 둔감한 것이다. 왜 아무도 몰랐지? 그 시선을.
  그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그 환희를. 그 목마름을. 
  그래서 제르가디스는 항상 그 반신을 어둠 속에 담그고 있는 형상이었다. 그 어둠이 어느 순간이고 마음을 먹기만 하면 단숨에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달리 무어라 할 말도 없어서, 라며 그저 바라보기만 해왔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방관이 호기심에 의한 것은 아니었나, 하고 가우리는 자문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변화가 일어났으나 그 변화는 가우리의 어떠한 예상과도 전혀 다른 것이었다. 흐릿한 눈동자로, 제로스가 누구냐고 물었었지? 리나의 말마따나 가우리 가브리에프나 할 법한 질문. 그 지점에서, 가우리는 더 이상의 고찰을 포기했다. 난해한 상황.
  부쩍 선잠이 는 리나가 자신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때마침 생각이 미친 이 충실한 ‘보호자’는 소박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던진 돌이, 꽤 오랫동안 수면 위를 내달렸다.
  그들은 세일룬의 경계에 와 있었다.
  그리고 리나는 눈을 떴다. 눈앞에서 낯익은 얼굴이 웃고 있었다. 아니 그것을 웃음이라 부를 수 있을는지. 그 가면은 이전보다 훨씬 창백해보였다. 둥글게 휘어진 눈, 엷은 곡선을 그리며 치켜 올라간 태연한 입매, 그리고 찰랑이는 보랏빛.
 
 
  “안녕하세요, 리나님.”
 
 
  상냥한 인사에 대답은 없었다. 일순간 어둠이 생겨나 공간을 집어삼켰고, 이윽고 사라졌다. 사라진 자리에 변함없는 두 개의 그림자. 소용없어요,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제로스는 곧게 편 집게손가락을 가볍게 흔들어보였다. 해왕 다루핀이 표현했던 바대로라면, 인사 대신 집어던진 이 애셔 디스트가 아마도 예의 그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착실하게 복습하는 자신이 자랑스러워지는 수신관 제로스였다.
 
 
  “말해, 제로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무엇을요?”
  “그 애들에게 무슨 짓을 했지?”
  “저런. 아이 취급은 그만 두세요. 그렇게 챙겨주지 않으셔도 충분히 제 앞가림들은 할 수 있는 나이니까요.”
  “요즘 우리 애들이 사춘기라 그런가 상당히 까칠해져서 말야.”
 
 
  ‘더’ 웃었다는 표현이 허용될 수 없다면, 제로스가 한 행동은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웃음 위에 웃음을 덧바르듯 그렇게, 차디찬 웃음이 만면에 걸렸다. 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몄다.
 
 
  “글쎄요. 가출 청소년은 제 전담 분야가 아니라서 말이에요.”
  “아아, 그래?”
 
 
  격한 분노를 삼키는 이빨 사이로 말은 떨림이 되어 새어나왔다.
 
 
  “그럼 네가 말해줄 수 있는 건 뭐지?”
  “뭐, 리나님이 익히 알고 계신 것들뿐이지요. 예컨대……”
 
 
  주위가 칠흑으로 덮였다. 허공으로 가볍게 떠오르는 제로스의 발끝으로부터, 통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마치 동심원의 물결 퍼져나가듯 공간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드리워진 검은 장막이 명멸하다 스크린이 되어, 하나의 영상을 비추어낸다. 시야는 점점이 붉다. 한 그루의 나무. 버티어 선 실루엣은 처절하리만치 낯이 익다……
 
 
  “아멜리아!”
 
 
  만신창이가 되어 천길만길 찢어지는 비명. 있는 힘을 다해 마음이 절규했다. 바로 귓전에서 들려온 나긋한 속삭임은, 가우리가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오는 동시에 영상도 마족도 흔적조차 없이 사라버린 다음에야, 그 모든 것이 꿈이었다고 수천 번 자신을 위로하고 난 후에야 기억 속에 떠올랐다.
 
 
  - 제가 악마라는 것 말입니다.
  
  
  
  * * *
  
  
  
  시야가 빙글빙글 돈다. 하루 이틀로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며칠이 지나도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순수한 정신체로서 무게를 느낀다면 어불성설이겠으나, 마음에의 무게노라 달리 생각한다면 오히려 천근만근이리라.
  이슬기 머금은 차디찬 그 날의 공기. 떠오르는 태양이 그렇게 간절하게 반가웠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빛 속에 나를 위한 온기는 없었다…… 단 하나의 빛, 있을 리 없는 눈물이 가득 글썽이도록 아름다운 그 존재는 이제 나를 비추고 있지 않으므로.
  휘청대는 어깨에 무언가가 와 닿았다.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여도, 어느 순간 와 닿는 타인의 감촉이 익히 알고 있는 낯익은 것이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가.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스치듯 지나가 이미 멀어진, 찰랑이는 바다색 머리칼의 뒷모습.
  새파란 시계(視界)가 불러일으킨 황홀한 착각……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더도 덜도 없이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 마족의 미덕이건만 이번에는 그러하지 못했다. 전신의 증오가 담긴 처절한 시선으로 자신을 쏘아보던 그녀를 객기라 비웃었던 그는 이제 자기 자신을 비웃어야 하는 것이다. 그의 모든 행위에는 언제나 그것에 합리성을 부여하는 외부적 요인이 존재했다. 델타 공국으로 향하던 제로스가 별안간 방향을 틀어 세일룬으로 날아든 것은 처음으로 아무런 이유 없이, 즉 무의식적인 요청에 의해 행해진 돌발 행동이었다. 무릇 마족이란 철저히 계산적인 존재.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혹여 달콤할까 애태웠던 그녀의 절망은 지독히도 쓴 맛이었다. 아니,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쓰디썼던 것은 다른 것.
  그 곁에 항상 머무는 금발의 검사로 말할 것 같으면, 그보다 더 달갑잖은 존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없이 다독이고 한없이 잊게 하고 한없이 웃게 하는 존재.
  그 시선과 마주쳤을 땐, 전신이 꿰뚫리는 고통이 엄습해왔더랬다.
  그 지독한 플러스 에너지는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다.
  겨우 몸을 가누어 델타 공국으로 향하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조금이나마 쉴 수 있었음에도 아무 일 없었던 듯 주저 없이 불장난을 위해 나선 것은, 명령이기 때문 이전에 하나의 기대를 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쫓는 그림자와 불사르는 그림자.
  분노하는 그림자와 기꺼워하는 그림자.
  수천 번 망막을 저미어내도 지울 수 없게끔 새겨진 그 모습을 다시 보기를.
  그저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끝없는 갈망과 번뇌와 방랑으로써, 그 자신이 스스로를 소멸로 몰아넣고 있었다.
  매초마다 리로드되는 자신에 대한 의심.
  아주 작은 틈새로도 순수한 정신의 결정체는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것.
  그 때, 갑작스레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빛이 시야로 쏟아져들었다. 현기증이 일어 제로스는 눈을 찡그렸다. 길이를 알 수 없는 찰나가 흐르고 눈을 떴을 때, 보였다.
  눈을 감고서도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는 낯익은 색채와 감촉과 온도를 가진 뒷모습, 낡고 바랜 상아색의 망토가.
  제로스는 그렇게 어리석다 비웃었던 인간의 모습을 하나씩 닮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경악했다. 예전이라면 절대로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이 꿈이기를 바라는, 그런 바보 같은 생각 따위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 * *
  
  
  
  “그럼 보수는 금화 열 개로 합의하도록 하지.”
  “좋아. 그러니까, 최대한 조용히 잠입할 것, 하지만 들키면 내가 시선을 끄는 것으로 하는 거지?”
  “그래.”
  
  
  정신은 놀랄 만큼 명료했지만, 몸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제르가디스는 등받이에 한껏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옆자리에 앉아 선금으로 받은 세 개의 금화 중 하나를 꺼내며 맥주를 주문하는 용병의 목소리는 먼 곳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당신, 흑맥주 할 줄 아나?”
  “축배를 들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군.”
  “그렇게 빠듯하게 굴 것 없어. 왕국 시절의 왕립도서관이라고는 해도 진작 폐가처럼 되어서, 고작해야 입이 찢어져라 하품만 해대는 경비가 한두 명 정도 있을 테니.”
  “글쎄. 그것뿐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엄청나게 신중하시군 그래.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고물더미에 관심을 갖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값나가는 건 이미 예전에 쓸어가고 없을 건데.”
 
 
  어디에나 있는 흔한 사내였다. 지극히 평범한 만큼의 오지랖에 묻지 않은 말은 알아서 늘어놓고, 말끝마다 머리를 긁적이며 히쭉 웃어 보여 상대를 방심하게 만들고 싶어하지만 승냥이 같은 눈빛은 잘 감추지 못하는 그런 사람. 좀처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평범한 사람과 함께 있어보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다. 
  남자의 말은 점차 더욱 아득해져가고 있었다. 벽에 대고 말하는 셈이니 제풀에 지쳐가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찌됐건 자신의 몸도 슬슬 노곤해지고 있어, 제르가디스는 이미 금화 한 닢 값은 훌쩍 넘겨버린 양의 맥주에 파묻히다시피 된 사내를 바에 남겨둔 채 일어섰다.
  하기야 우습기는 했다. 오래 전에 몰락해버린 왕가의 폐서더미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금화 열 닢이라는 큰돈을 선뜻 지불하게끔 만드는, 단순히 몸을 되돌리고 싶은 욕망 외의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는 것은 어디까지나 제르가디스의 느낌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날카로움이 빗나간 적이 한 번도 없었건만 직감이라는 것이 이번처럼 근거 없기는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어, 방에 들어선 제르가디스는 짜증 섞인 몸짓으로 망토를 벗어 내팽개쳤다.
  무슨 바보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한 적도 적지는 않았다.
  종종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혹은 알고 있었으나 원치 않는 와중에 음모의 한복판에 놓이곤 했었다. 정신을 차려보면 빨간 머리의 소녀는 마족의 계략에 휘말려 그들이 이끄는 대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고 그러다가 돌연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기 일쑤였다. 그 때의, 다른 게 아니라 황당함이란.
  지금의 기분은 마치 그런 식이었다.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
  그 느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극히 친숙하게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르가디스는 소스라쳤다. 언제고 몇 번이고, 이런 기분을 느꼈었다. 무엇일까, 이 커다란 구멍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마음 한편의 빈 곳. 존재가 허무를 인식할 수 없듯, 커져가는 공백 언저리에서 맴만 도는 내내 불쾌감만이 솟구쳤다.
  무언가가 스멀스멀 전신을 기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엄습해왔지만, 지켜보는 것조차 차마 할 수 없어 등을 돌린 채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존재를 눈치 채지는 못한 채 제르가디스는 눈을 감았고, 곧 잠에 빠져들었다.
  
  
  
  * * *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여왕은 천 년 만에 처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미간의 주름조차 곧구나. 다루핀은 생각하며 디저트를 집어 들었다. 인간의 눈알을 꼭 닮은 쿠키는 탁, 하고 입안에서 일그러지는 감촉까지도 똑같았다. 혀뿌리를 감싸며 사방으로 퍼지는 감미로운 혈향.
 
 
  “왜 그래? 너 답지 않게.”
 
 
  수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늘게 치켜뜬 눈초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팽팽히 당겨진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치열한 응시를 받아내던 찻잔은 산산이 부서졌다. 다루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물빛 소맷자락을 떨쳐 파편을 쓸어내었다. 제라스가 가장 아끼던, 용족의 골회로 만든 금색 찻잔이 가루가 되어 허공을 수놓았다. 근 이백오십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았으면서 한 톨의 먼지조차 내려앉는 것을 용납지 않았을 정도로 애지중지하는 찻잔을 모처럼 꺼낸 것은 그만큼 기분 전환이 절실했다는 것이었겠지만, 깨진 찻잔 가루를 공중에 뿌리며 그 아름다운 산개함을 감상하는 취미가 있지 않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나면 아마 찻잔에 대한 분노, 혹은 찻잔을 깨뜨린 자신에 대한 분노로 소멸하는 최초의 대마족이 될지도 모른다고 다루핀은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 난들 어쩌라는 거야.”
 
 
  세계에 던져진 직후부터 모든 개체는 자신의 창조주에 대해 하나의 의무를 갖는다.
  그것은 창조주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한 계속해서 존재할 의무.
 
 
  “제 놈이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해.”
  “말은 잘한다.”
 
 
  말만 많은 건 너지, 라고 평소라면 받아쳤을 수왕 제라스 메탈리움은 그러나 말없이 찌푸려진 미간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그렇게 말해도 결국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잖아.”
  “당장 소멸하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저대로라면 내가 손을 쓴다고 해도, 죽어버린 시체를 억지로 멱살 잡아 일으키는 것밖에는 안 돼.”
  “맹수 조련이 아니라 좀비술에 취미가 있었나봐? 그레이터 비스트 제라스 메탈리움.”
  “작작 빈정대시지, 디프시 다루핀. 접시 물에 코 박게 만드는 수가 있어.”
  “분부대로, 여왕마마.”
 
 
  매우 정중하게 허리까지 굽혀 보인 후 그것이 정말로 인사였던 모양으로, 해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퇴장 직전 장난스러운 윙크를 날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끝마다 꼬집어 비트는 재간은 천성이니 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제라스는 화가 났다. 아니, 다루핀에게가 아니었다.
 
 
  “그라우세라.”
  “……음.”
 
 
  대답은 한참 만에 돌아왔다.
  악명 높은 마왕 살해자, 리나 인버스에 의해 치명상을 입고 아스트랄계로 강제 송환되었던 패왕 다이너스트 그라우세라는 마계에 은둔하면서 잘려나간 힘을 복구해가고 있었다. 최근의 취미는 낚시로, 대개는 패왕궁 정원에서 인세(人世)로 통하는 연못에 낚싯대를 드리운 채 가만히 앉아 상념에 잠기기 마련이었지만 어쩌다 운 나쁘게 걸려들곤 하는 생물을 낚아 올리는 재미도 쏠쏠한 모양이라는 것이 풍문으로 들려오는 바였다. 
  특히 인간이 걸려들 때면, 아득히 떨어진 수왕궁에까지 그의 희열에 찬 고함이 들려왔다. 보아라, 인간이란! 제가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현명하다고 자부하지만 실로 더 이상 어리석을 수가 없는 이 족속이란!
 
 
  “하지만 자기는 그 어리석은 인간한테 반절이 뭉텅 베여나갔더랬지?”
 
 
  누구의 독설이었는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낚시는 잘 되어가?”
  “오늘은 허탕인 것 같군.”
  “그래, 좀 어때?”
  “허탕이라니까 왜 자꾸 물어.”
  “낚시 말고 너.”
 
 
  텔레파시의 저편이 조용해졌다. 수왕은 기다렸다. 조급할 것 없다. 시간은 무한한 것.
 
 
  “…그럭저럭 좋아진 것 같군.”
  “잘 됐군. 나 좀 도와줘야겠어, 그라우세라.”
 
 
  낚싯대를 거두는 모양인지 패왕은 다시금 침묵했고, 그녀 역시 다시 기다렸다.
 
 
  “갓 병석에서 일어난 환자에게 너무 무리한 걸 시키지는 말아.”
  “걱정 안 해도 돼. 널 부려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다루핀이 알면 꽤나 서운할 것이다, 생각하면서도 망설임은 없었다. 다루핀의 해신관으로 말할 것 같으면 주인을 닮아 매끄럽게 노니는 세 치 혀로, 아마 크고 작은 왕국을 수백 개는 멸망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두뇌 플레이가 아니라고 제라스는 판단했다.
 
 
  “그라우를 좀 빌려야겠어.”
  “아아. 좋을 대로.”
  
  
  
  * * *
  
  
  
  “달이 밝군.”
 
 
  달 밝은 밤, 나란히 앉을 때면 언제나 꺼냈던 그 첫마디가 그 날 이후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었다.
 
 
  “제로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혼돈의 한 페이지에 처음부터 예견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의 뼛속에 새겨진 영원과 그의 뼛속에 새겨진 영원이 처절하리만치 같은 동시에 서글프도록 다른 것처럼.
 
 
  “……고 생각해본 적 있나?”
  “예?”
 
 
  한숨 섞인 웃음. 만면에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도드라진 고운 선의 옆얼굴. 천천히 달싹이는 푸른 입술. 일순간 넋을 빼앗겨 무엇도 들리지 않았었다.
 
 
  “그만두지. 너한테 뭐 하러 이런 얘길……”
 
 
  일어서는 그의 뒷모습에서 제로스는 눈을 떼지 않았다. 일행의 머리맡에 놓인 주머니를 조심스레 집어 들어 야영지 주변에 백반(白礬)을 뿌린 후 제르가디스는 다시 나무로 돌아와 앉았다. 등을 기대는 소리조차 없었다. 그토록 가벼움에도 제풀에 천근만근 짐을 짊어진,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그.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하루 사람을 지치게 만들어……”
 
 
  흐려지는 말끝은 붙잡으려는 몸짓이 무색하리만치 교묘한 자취를 그리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의식도 함께 빠져나가는지 제르가디스는 눈이 점차 감기는 것을 느꼈다. 이마에, 볼에, 그리고 입술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와 닿았던 것도 같지만 모든 것이 뚜렷하지 않았다. 흐릿해지는 의식을 마침내 놓으며 겨우 입술을 달싹일 뿐.
 
 
  “하기는 천년도 더 산 너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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