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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오!” 외치는 목소리는 여전히 잠겨 있었다. 블라인드를 젖히고 나와 헝클어진 머리를 추슬러 묶으며 거실로 향하는 걸음이 제집 거닐듯 여상해 뻔뻔하다 할지 딱하다 할지. 드레이코는 혀를 차고는 보고 있던 예언자일보로 다시금 눈을 돌렸다.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두 차례 났다. 잘박거리는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꼴이 엉망이야, 위즐리.”
“힘든 하루였어.”
“재미있네. 나도 그랬거든.”
“넌 무슨 일이 있었는데?”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만나서,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지.”
론은 눈을 끔벅거렸다. 딱히 궁금한 기색도 아니었기에 드레이코는 그렇게 말하고만 말았다. 이야기라 부르기 무색한 일방적인 부탁이었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키가 작고 갈색 곱슬머리인, 우리 엄마들 나이쯤 되는 마녀를 기억해?”
“글쎄. 그것만으론 모르겠는걸.”
“호그와트에서 우릴 가르쳤다더군.”
“그랬던가? 무슨 과목인데?”
“기억 안 나.”
“……그 사람이 누군지 정말 궁금하긴 한 거야?”
“무슨 말이야?”
“전혀 안 궁금해 보여서.”
들켰네. 말 대신 드레이코는 한쪽 눈썹을 과장되게 들어올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픽 웃으며 “어련하시겠냐.” 대꾸하는 론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익숙했던 대상이 순간적으로 낯설어지는 기묘한 위화감. 미시감은 엄습했던 그대로 빠르게 사라졌다. 드레이코는 눈을 깜박거렸다. 남은 것은, 애당초 ‘익숙하다’다고 느낀 것부터 문제였다고 하는──
“맞아.”
드레이코는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중의적인 긍정이었다. 암녹색 눈을 가진 남자나, 번개 모양의 흉터를 가진 불청객은 매개변수에 불과했다. 그가 알았던 위즐리와 그가 알고 있는 위즐리. 그래야 하는 것과 그러한 것. 간극에 끼어 어쩔 줄 모르는 채, 드레이코의 사고(思考)는 순간적으로 길을 잃었다.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은 론이 그의 눈앞에서 손을 휙휙 젓지 않았더라면, 어디로 떠밀려갔을는지 모를 노릇이다.
“말포이?”
“……파티에서였어.”
“뭐?”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무심코 내뱉으면, 이내 후회했다. 드레이코는 자조했다. 처음부터 후회 그 자체였다. 주류(主流)와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루시우스의 집착을 치사스럽다 느끼기엔 드레이코는 제 부친을 너무나도 잘 이해했다.
낫고 없는 이마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기억 속에서 끌어올려진 아픔이었다.
드레이코는 무의식적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있었던 모양인지, 도드라진 미간에 손끝이 걸렸다.
“예언자일보에서 주최한 그거?”
“그래.”
론은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열처럼 남은 수치심은 좀처럼 가실 줄을 몰랐기에, 드레이코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해리였군.”
고개를 주억거리며 론이 말했다.
“뭐?”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 말이야.”
“……”
“아직도 그러냐. 애들도 아니고.”
허, 하는 탄식이 드레이코의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가 근래 들은 가장 어처구니없는 면박이었다. 론의 입장에서는 반쯤은 농담이었고, 빙글빙글 웃는 론의 입매를 보며 드레이코 역시 머리로는 인지했지만, 버럭 내질러지는 것은 도리가 없었다.
“그 녀석이 나한테 너ㄹ……!”
외침은 중간에서 뚝 끊겼다. 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드레이코는 당황한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말끝을 끌었다. “……너무 뻔한 시비를 걸잖아.” 부자연스럽기는 했다. ‘널 부탁한다고 했다 왜.’ 하려던 말을 하는 편이 나았을까? 론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모르지, 시비를 건 게 해리인지 너인지는.”
그 일에 관해서는, 할 말은 분명 드레이코 쪽에 있었다. 눈썹 하나 까닥 않고 제 손 위로 샴페인을 부어버린 쪽이야말로 해리가 아니던가. 게다가 그 뻔뻔하기까지 한 ‘부탁’이라니. 그러나 자기변호를 하는 대신 드레이코는 격양되었던 등 근육을 느슨하게 풀어 내렸다. 소파 깊숙이 몸을 묻는 그의 입가에 비웃음 같은 비뚜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할 말은 아니지.”
“내가 왜?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네 소파에, 이렇게나 느긋하게 앉아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라면, 도량이 넓은 건 네가 아니라 내 쪽 아냐?”
“쩨쩨하게 따지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이래놓고도 해리가 시비를 걸었다고 당당하게 주장한단 말이지.”
“닥쳐, 위즐리.”
드레이코는 짜증스레 쏘아붙였다. 론은 과장된 웃음소리를 내며 드레이코가 내려놓았던 예언자일보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펼쳐진 면에는 채 손을 대지 않은 십자말풀이가 기재되어 있었다. 퍼즐을 풀려던 참에 욕실에서 걸어 나오는 론에게 드레이코는 말을 걸었던 것이다.
눈으로 퍼즐을 훑으며 무심히 툭 던지듯, 론은 중얼거렸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정말이야.”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어 드레이코는 침묵을 지켰다. 론은 몇 초간 더 십자말풀이를 쳐다보았지만, 딱히 흥미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이내 소파에서 일어나 제 몫의 차를 끓이기 위해 부엌으로 걸어갔다. 망연함도 잠시, 드레이코는 그 태연한 뒷모습에 재차 어이없어하며 빨간색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넌 왜 안 왔어? 초댈 받았을 텐데. 포터가 똥 씹은 표정으로 나타난 걸 보면 예언자일보에서 지칠 때까지 초대장을 보낸 게 뻔하니까.”
드레이코가 진저리를 칠 것이 분명한 멀겋게 우린 아삼에 설탕 세 조각을 빠뜨리며 론은 뜯어보지도 않고 벽난로 속으로 던져 넣은 편지봉투를 떠올렸다. 마법부로 한 번, 집으로 한 번. 집의 벽난로는 지펴지지 않은 지 오래이기에 두 번째 초대장은 여전히 나뭇재 속에 파묻혀 있을 것이었다.
소파로 돌아온 론의 찻잔 속을 본 드레이코는 젓지도 않은 설탕 가루들이 바닥에 고여 있는 것을 보고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체념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론은 어깨를 으쓱했다. 몸짓은 대답이기도 했다.
“뭐, 이 몸이 맡으신 일이 워낙 많아야지.”
“높으신 국장님이 파티에서 술잔이나 부딪치는 동안?”
질문은 삐딱했다. 달큰하면서도 쌉싸래한 알갱이가 혀끝에서 바스러지는 것을 굴려보다 말고, 론은 돌연 진중한 얼굴을 했다.
“그것도 맡은 일이야, 그 녀석에게는.”
드레이코는 대꾸하지 않았다. 마뜩찮은 기분은 좀처럼 가실 줄 몰랐다.
찻잔을 내려놓은 론이 드레이코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뜻이라도 담긴 양 드물게 지그시 얹어지는 그런 시선이었다. 그 눈길이 빤해지도록 견뎌낼 재간도 없어 대뜸 쏘아 날린 짜증 섞인 헛기침이 무색하게 론은 금방 입을 열지 않았다. 신경질적인 리듬으로 드레이코가 탁자를 두드리자 누워있던 깃펜이 부스스 일어나 십자말풀이의 빈칸을 채우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소리 위로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뿌려진 것은 줄지은 빈 네모들이 거지반 까맣게 메워질 무렵이었다.
“일주일 쯤 뒤에 순찰이 있을 거야.”
탁자에 처박다시피 했던 고개가 느릿하게 들리었다. 저를 피해 애먼 데를 도는 론의 시선을 붙잡으려는 짧은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 후, 그 변덕스럽고 노골적인 회피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금 눈길을 내려뜨리며 드레이코는 물었다.
“누가, 어디서?”
“여기, 녹턴 앨리에서. 임무가 없는 오러들이 전부 동원될 거야. 나도 포함될 거고.”
“왜?”
“소문들 때문이지. 늘 있는 그런…… 젠장, 너도 잘 알잖아.”
드레이코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일종의 불심검문인 셈이었는데 녹턴 앨리에 오러들이 돌아다니는 일은 흔하지는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녹턴 앨리가 평범한 마법사들에게 여전히 피하고 싶은 장소 중의 하나로 남아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드레이코가 딱히 얽혀든 적이 없는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이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어떻게든 빠져나갔을 것이다. 말포이의 이름값에는 아직까지 그 정도의 수완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제 문제인 양 곤혹스러워하는 론의 표정이야말로 드레이코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가장 놀라운 것은 론이 그에게 검문에 대해 귀띔을 해주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입꼬리가 무심코 올라갔다.
“그 얘길 왜 나한테 해주는 건데?”
묻기 전부터 이미 론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향해 그럴듯하게 눈썹까지 들어올리며, 할 수 있는 가장 천연덕스러운 말투로 드레이코는 덧붙이는 것이었다.
“내가 뭔가 꺼림칙한 일이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해?”
“만약에! 만약이라는 거야. 그리고, 모르는 사이에 관련이 됐을 수도 있잖아. 녹턴 앨리는 그런 곳이니까.”
“나 상처 받았어, 위즐리.”
“뭐야? 사람이 걱정해서 말해줬더니……”
“걱정했어?”
입을 꾹 다무는 론의 찌푸린 얼굴은 드레이코에게 학창 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묘하게 반가운 기분이 들어, 덧붙이는 드레이코의 목소리에 한층 심술이 어렸다.
“넌 남 걱정 하나는 정말 잘 해.”
“남 말 하시네.”
론도 지지 않고 응수해왔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코웃음을 쳤다. 속으로 얼마간 뜨끔했지만, 될 수 있는 한 티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드레이코가 공연히 깃펜을 툭 건드려보는 동안 론은 찻잔을 비웠다. 그러고는 밑바닥에 남은 설탕과 눈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알고 있는 단맛을 떠올리자 밀크티 생각이 났다. 따뜻한 밀크티 한 잔과, 심심할 정도로 담백한 스콘. 그 황홀한 상상이 역설적으로 론을 다그쳤다. 언제까지고 앉아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그는 선 안에 머물러야 했다. 드레이코 말포이라는 이름이, 그리고 그 자신이 그어놓은.
일어나야한다고 생각한 머리와는 반대로 상념은 누적된 피로와 합세해 몸을 짓눌렀다. 잠결처럼 꾸물거리던 론의 주의를 깨뜨린 것은 정말로, 정말로 뜬금없는 드레이코의 물음이었다.
“딱히 궁금해서 묻는 건 아닌데 말이지. 네 그 악몽이란 건…… 어떤 내용이야?”
말마따나 호기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심한 회색 시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좇아지는 기분이 론을 곤혹스럽게 했다. 목표로 삼은 대상의 내밀함 때문에 질문은 얼마간 무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드레이코는 대답 대신 무시나 면박 같은 것이 날아오리라 생각했다. 따라서 그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론의 입이 멈칫거리며 열리는 것을 보면서.
“악몽이라고 해도, 깨고 나면 별로 기억나는 게 없어. 아마──”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켠 후, 론은 천천히 내뱉었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꿈이겠지.”
둘은 동시에 얼굴을 찡그렸다. 론의 복잡한 심경은 차치하고라도, 그의 담담한 진술은 드레이코로 하여금 스스로의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떠올리게끔 만들었다.
공연한 질문에 이어 듣지 않느니만 못한 대답이었다. 드레이코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그의 세계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는 격변을 겪었다. 옳고 그름, 강함과 약함, 승리와 패배. 목도한 수없는 죽음들. 가문의 몰락.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
폐부로부터 토해내듯 드레이코는 한숨을 내쉬었고, 깊숙이 들이쉬었다. 희미한 다향과 함께 들이마신 공기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며 기진맥진한 의식을 끌어올렸다. 그는 론의 당황한 기색을 알아차렸고, 어깨를 으쓱하며 딱 반만큼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순순히 말해줄 줄은 몰랐어.”
“믿거나 말거나, 너랑 얘기할 때의 내 상태가 가장 평화적인 상태라서 말이지. 뭐, 딱히 네가 그렇게 만들어준다는 뜻은 아니다만.”
“내 덕분이 아니면 누구 덕분이라는 거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너라는 인간 덕분인지, 네 비싸고 푹신한 침대 덕분인지를.”
드레이코는 코웃음을 쳤지만 론의 어조가 불필요하게 들썩거린다는 사실을 구태여 지적하지는 않았다. 겸연쩍음이 희미하게 어린 얼굴을 하고선 론은 지팡이를 휘둘러 빈 찻잔을 치웠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 동안 생각은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고 그에 따라 드레이코의 미간도 오므라들었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을 멀거니 쳐다보던 론과 드레이코의 눈이 마주쳤을 때, 드레이코는 공연히 허공을 쳐다보았고 론의 시선은 테이블을 향해 미끄러지듯 떨어뜨려졌다. 고요를 깨뜨린 것은 론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였다. 정확하게는 드레이코가 채우고 있던 낱말풀이 속의 어느 곳을.
“거긴 디센도가 아니라 디핀도야.”
“어떻게 알아? ‘힌트 없음’이라고 적혀 있는데.”
“가로 7번 ‘수색꾼을 제거하라’. 이 문제의 답은 스크림저지. 그럼 세로 9번은 히포그리프가 될 거고. 그러니까 여기가 디핀도.”
드레이코는 자신이 그러잖아도 주름이 져 있는 미간을 더욱 좁혔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론의 풀이에서 흠을 찾아내기 위해 예언자일보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결국 소파 등받이를 향해 털썩, 내던지다시피 등을 기댔다. 마법 깃펜이 종이 위에서 글자를 지우고 새 알파벳들을 차례로 적는 것을 보며 론은 빙그레 웃었고, 덧붙였다.
“집중할 때 인상 쓰지 마. 그러다 주름 생겨.”
“……”
무심코 미간에 손가락을 가져가려다 말고, 드레이코는 발끈하는 대신 끙 소리를 냈다.
‘히포그리프’까지 적어 넣어 제 할 일을 마친 깃펜이 탁자 위에 얌전히 누웠다. 드레이코가 고개를 들었을 때 론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드레이코가 익히 알고 있는, 떠나려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벽에 걸린 망토를 집어 걸치고, 순간이동을 하기 위해 집중하기 직전의 얼굴.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는데도, 드레이코는 순간적으로 제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퀭하게 꺼진 눈, 핏기 없는 얼굴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녹턴 앨리 한가운데서 용서받지 못할 저주를 상대로 동작 그만 주문 따위를 날려대던 예전의 론은 지금보다 훨씬 참혹한 몰골을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여전히 드레이코 말포이가 알고 있는 론 위즐리와 같은 선상에 있었다. 불꽃처럼 화르르 타오르고 있었다고나 할까. 제가 생각하고도 영 우스운 듯해 드레이코는 입술 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런 드레이코에게서 등을 돌린 채, 소파에서 일어선 론은 벽을 향해 팔을 뻗고 있었다. 바로 지금과 같이, 불꽃도 무엇도 아닌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들 사이로 셔터를 내린 것처럼 선뜩 덧씌워질 적에, 드레이코는 눈앞의 론이 제가 알던 그가 맞는지 의심하곤 했으나 끝은 언제나 확신이었다. 왜냐하면, 드레이코 자신도 그와 딱 똑같게 굴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주 오래 전, 머리 위로 무겁게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을 적에.
너도 똑같은 것을 바라고 있을까?
드레이코는 확신할 수 없었다.
위태로움이 여전히 론의 주위를 오라(aura)처럼 감싸고 있었을 뿐.
“위즐리.”
망토를 집어 들던 론의 고개가 드레이코를 향했다.
“그냥 도움을 받는 건 어때.”
무심한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한동안 말이 없던 론이 이윽고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몸짓은 매우 어색해보였다.
“곤란하면 그냥 그렇다고 말해.”
“곤란하다고 하면 어쩔 건데? 다른 대책이라도 있어?”
“네가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어쨌든 불편했다면……”
“그렇게 말한 적 없잖아. 삐딱하게 굴지 마. 보아하니 포터가 왜 너한테──”
드레이코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자신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해리가 론의 지팡이를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구태여 비밀에 붙여줄 의리는 없었다. 그 사실을 말해버린다면 론의 관심사는 해리에게로 옮겨갈 것이다. 드레이코 자신은 멀찌감치 물러나 구경하기만 하면 될 터이다.
‘아니, 구경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분명,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결코 말을 걸지도 마주치지도 않을 예전으로.
‘그게 어때서?’
생각했지만, 생각과는 달리 드레이코는 다문 입술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론은 부자연스럽게 끊긴 말끝을 추궁하지 않았다. 겨를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처럼 웅얼거렸다.
“말포이. 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난 이런 대화가 진짜 지긋지긋해.”
“알아. 알아들었다고. 곤란하다든지 불편하다든지 생각한 적도 없어. 무슨 대단한 손님인 것처럼 착각하진 말지?”
“……그래, 부탁이니 제발 계속 그렇게 굴어주라. 그리고 언제든지 싫다고 말해. 너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부탁했던 거니까.”
론의 얼굴은 드레이코가 본 이래 가장 지쳐 보였다.
위로? 격려? 드레이코는 고개를 저었다. 줄 수도 없고, 바라지도 않았다. 그가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만이 줄 수 있는 말들이었다. 결코 부드럽지도 상냥하지도 않은 말들.
“싫다고 말할 일은 아마 없을 거야.”
어째서? 눈으로 묻는 론에게 드레이코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너나 포터에게 뭔가 빚을 지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너답다, 진짜.”
우리답지. 입속으로만 중얼거리며 드레이코는 생각했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기억들로 점철되어 있다 하여도,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들을 두르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관계 쪽이 훨씬 편할 것이라고.
관계는 지층이었다. 시간과 우연이 차곡차곡 쌓여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그 갑작스러운 단절이 달가울 리 없는 것은, 드레이코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
정말로 꼭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드레이코는 계산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두엇씩 짝을 지어 녹턴 앨리를 돌아다니는 오러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 수는 드레이코의 예상보다 조금 많았다. 우연히 스쳐 지나간 면면들을 포함해 대부분 낯이 익었지만, 론의 언질로 의식하고 있던 중이 아니었다면 그들을 보자마자 오러라는 사실을 깨닫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남녀 한 쌍이 가게로 들어섰을 때, 드레이코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생각은 뒤늦게 따라왔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오러는 론 위즐리일 수도 있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은 존재했었다. 인지했다는 것은, 결국 그 가능성에 일말의 의미를 부여했다는 사실로 연결된다.
‘기대했다고?’
자신의 생각을 황당해하며, 드레이코는 다시 한 번 싱거운 웃음소리를 냈다. 오러로서의 론 위즐리와 만나는 일이 유쾌한지 묻는다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오러로서의 론을 기다린다는 것과 제 신세를 지는 론을 기다린다는 것, 요컨대 1층에서의 기다림과 2층에서의 기다림, 양자는 똑같이 드레이코에게 희미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마냥 불쾌하다 할 수 없었고 그렇기에 도리어 불쾌했다. 드레이코는 여전히 멈추어야 할 지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어느 쪽의 론이 방문하더라도 지금보다는 조금 덜 지루한 오후가 되었으리라고,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쨍그랑.
깨진 찻잔의 파편들에 그의 시선이 못 박혔다. 새하얀 조각들 위로 드문드문 스쳐 지나는 금색의 테두리. 조금 전까지 찻잔에 담겨 있던 우롱차는 불그스름한 얼룩이 되어 바닥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거 실례.”
말뿐이었다. 눈썹 하나 까닥 않는 젊은 마법사의 옆에서 굴토끼를 닮은 작달막한 마녀가 혀를 쯧 차고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복구된 찻잔은 어딘가 어설펐다. 솟구치는 짜증을 감추기 위해 지독하리만치 무표정이 된 얼굴로, 가장 아끼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드레이코는 생각했다. 역시 갖고 내려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마법사는 지팡이로 허가서를 훑어 내렸다. 두 번, 세 번. 네 번째로 지팡이가 양피지 끝을 건드리는 순간, 마녀는 다시 한 번 입속에서 못마땅해 하는 소리를 냈다. “스코트.” 이름이 불린 남자는 그것이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경멸에 찬 표정이라는 사실을 숨기려는 노력도 없는 한층 비딱한 얼굴로, 꼼짝도 않고 서 있는 드레이코를 포함해 가게 안을 한 바퀴 둘러본 후 홱 돌아섰다. 걸어 나가는 어찌나 기세가 좋은지 펄럭인 망토자락에서 바람이 일 지경이었다.
드레이코는 마녀가 동료의 무례를 대신 사과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불편함 역시 딱 그 정도였기에. 대강 휘둘러진 지팡이 끝에서 본래의 빛깔에 한참 못 미치는 모양으로 재탄생한 다기가 그의 생각을 뒷받침해주었다. 차라리 론이 그랬던 것처럼 엉망으로 만들었더라면 다시 손 볼 여지가 있었을 테지만── 그런 식으로, 다시금!
잠시 후, 짹짹거리는 목소리가 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녹턴 앨리 23번지, 말포이 씨. 이상은 없군요.”
물론이지, 네 동료가 미리 알려줬거든. 그렇게 말하는 대신 드레이코는 접대용 미소를 띠었다. 그는 녹턴 앨리의 다른 상점 주인들처럼 공연히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반대로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쓰지는 않았다. 그가 뭇사람들로부터 사고 있는 반감들은,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다르게 표면적인 방식으로 특별히 더해지거나 해소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원한다면 어느 정도는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드레이코는 모든 시도가 부질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자신이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전자가 부친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으려는 무의식 속의 방어 기제라면, 후자는 의식적인 자기방어라고 할까.
마녀는 남자가 던지고 간 양피지를 집어 들어 품 안에서 꺼낸 깃펜으로 서명을 한 후, 지팡이를 몇 차례 휘둘러 만들어낸 사본을 갈무리해 소매 속에 집어넣었다.
“그럼 이만.”
더 머물고 싶지 않다는 듯 쌩하니 나서는 뒷모습에 대고 고개만 까닥 끄덕이는 동안 드레이코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붙임성 없이 굴지 말고.’ 말했던 론의 목소리가. 일주일 전, 가게를 나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론이 했던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리라는 것을 그 역시 예견했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드레이코는 쓰게 웃었다. 비로소 얼굴로 드러나는 본심이었다.
20160319. To be cont. BGM : TeMPlatonic (SoundTeMP / Ragnarok Online)
* 오랜만에 생존신고다운 생존신고를 하는 느낌적인 느낌이랄까~
* 2년 반은 너무하긴 했지.
* 면목이 없습니다...
* 님들 언제 드레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