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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다크 월-드 안 보고 쓴 글
눈 먼 신은 겨우살이를 내던졌고, 그것은 빛의 신의 목울대 바로 아래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말세의 개막이었다. 어디에서부터 어긋났으며 무엇을 바로잡아야 할는지 전능한 오딘도 알지 못했다. 역사를 반추할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찬란한 계절은 저물어, 결코 끝나지 않을 겨울이 시작되었다. 바싹 마른 곡식의 잔해가 동토 위에서 어지러이 굴러다닐 때, 짐승들은 가락 같은 울음을 내뱉으며 죽어갔다.
그리고 로키는 돛대 위에 서 있었다.
죽은 자의 손톱을 엮어 만든 거대한 선박은 바야흐로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로키는 한 쪽 발끝으로 돛대 꼭대기를 가볍게 걷어찼다. 뼈가 부서질 적과 비슷한 소리가 나며 기둥 끄트머리에 금이 갔다. 그만한 균열은 아주 쉽게 복구될 수 있었다. 배가 온전히 건조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일각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키는 무료해하는 어린아이처럼 일정한 박자로 발끝을 까닥거렸다. 툭, 툭. 무미건조한 소리가 울릴 때마다 하얗게 가루가 비산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로 죽은 자의 땅을 찾으셨습니까.”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려왔고, 눈앞에서 들려왔고 사방에서, 전신을 통해 들려왔다. 로키는 느릿느릿 발을 내리며 미완성의 배가 정박해있는 얼음강의 변에 서있는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저만치 멀어 보이는 동시에 코앞에 있는 것처럼 가까웠다. 이곳은 여인의 왕국이었다. 오딘이 아스가르드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도 결코 부재하는 법이 없는 것처럼, 그녀 역시 자신의 이름을 가진 망자의 나라 어느 곳에나 존재했다.
부정(父情)을 바람 없이 아버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것치고 그녀의 얼굴은 평온했다. 거기에는 일말의 조소도 없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부당하지 않았다. 반신은 성숙한 여인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다른 반신은 한층 더 부패한 것처럼 보였다. 운명의 농간이었는지 명명자의 선견지명이었는지, 심연에 버려진 소녀는 제 이름의 전 주인이 밟았던 길을 그대로 걸었다.
“재미있는 단어를 쓰는군.”
“헬라 로키스도티르.”
로키는 움찔했다.
“그가 저를 그렇게 불렀습니다.”
알만했다. 그것은 아마 로키 오딘슨, 하고 부를 때와 아주 흡사한 억양이었으리라.
“그가 이곳에 왔었나.”
“그렇습니다.”
“왜 왔다던가? 아니, 듣지 않아도 뻔하군.”
헬라의 반쪽 입이 웃음기를 머금었다. 다른 반면(半面)에서는 턱뼈가 덜그럭거렸다. 하얗게 드러난 뼈대의 표면 위로 거무튀튀하게 썩은 살점들이 혼돈을 질서 삼아 산란해있었다. 다시 보아도 참으로 정치하게 빚어진 육신이었다. 저 괴물을 빚어낸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대해 엷은 자부심마저 느끼며, 로키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발더를 돌려 달라 했을 테고.”
헬라는 고개를 까닥여 긍정의 뜻을 표했고 로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헬라의 입을 통해 들을 때조차 모든 것이 토르다웠다.
“그는 부질없는 짓을 꽤나 좋아하지.”
“그는 합당한 값을 제시했습니다.”
“뭐라고?”
“당신 몫의 눈물을 자신이 대신 흘리겠다 했습니다.”
로키는 어금니를 으득 깨물었다.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악에 받치었다. 입 속에서 한 자 한 자 짓이겨진 낱말들이 그로부터 뱉어져 나왔을 때, 헬라는 더할 나위 없이 가라앉은 음성으로부터 고함을, 혹은 비명을 들었노라고 확신했다.
“어림없는 소리.”
망자의 뼛속까지 스미는 냉기가 휘몰아쳤다. 그보다 더 명백할 수 없으리만치 적나라하게 발산된 신의 적의에 놀라 달려온 해골 병사들을 헬라는 손짓으로 저지시켰다. 그녀는 로키의 파르스름한 피부에 돋아난 얼음 가시들을 담담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적의는 헬라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 대리는 내가 동의하지 않는 한 불가능해. 물론 나는 동의하지 않을 거고.”
“그가 대신하지 않는다면 아스 신들은 당신에게 벌을 내릴 것입니다. 가장 가혹한 신벌이 준비되고 있는 것이 제게도 느껴집니다.”
“아스 신들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치들이지. 피비린내가 여기에서도 맡아지는군.”
“그는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형제가 아닌 산 형제를 위해.”
탄식은 폐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흘러나왔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어졌을 때에는 종잇장처럼 얄팍한 숨결이 되어 한기 속으로 흩어졌다. 형제라는 단어의 역함은 차치하고라도 그는 토르에게서 한 번도 그와 같은 무량한 아가페를 바란 적이 없었다. 로키는 처음 토르의 존재를 인식한 순간부터 끊임없이 그와 같아지기를 바랐으며 아가페는 결코 동등한 대상에게 향하는 사랑이 아니었다. 나란히 서야만 했다. 때때로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수단을 불사하면서까지.
로키는 체념으로 구부정해져있던 등을 곧게 폈다. 헬라는 그의 입이 열리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가 가진 어떤 것도 나를 위해 흘려져서는 안 돼. 세상에서 가장 가치 없는 것 중의 하나인 나의 눈물을 대신해서라면 더더욱.”
로키가 돛대 꼭대기에서 그녀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녀 역시 로키를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헬라는 형형한 녹색의 안광을 말없이 응시했다. 다른 것이 문제라면 내쳐지면 그만이었다. 자신과 두 오라비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가장 큰 증오와 가장 큰 사랑은 같음에서 비롯되었고 같았으며 같은 것을 향한 것이었다. 로키 자신은 부정할지언정, 헬라는 피가 섞이지 않은 형제가 그 누구보다 닮았다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로키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장 달랐고 가장 같았다. 심지어 서로에게 주고 있는 것마저도. 덜함도 더함도 없이.
헬라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제삼자가 감히 끼어들 수 없는 모순이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아버지.”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로키의 웃음소리가 주인의 이름을 가진 땅 곳곳으로 너울처럼 퍼져나갔다. 파르르 번지는 진동에 병사들의 뼈마디가 덜그럭거리며 기괴한 합주를 만들어냈다.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네가 알까?”
헬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난 널 자식으로 키운 적이 없어. 그러니,”
돛대 끝에서 이물로 사뿐히 내려서는 로키의 발치에서 바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로키의 발끝이 닿을 적마다 하얗게 얼어붙는 나글파리의 뱃머리는 망자의 잔해가 자아내는 칙칙한 색채에 기묘한 생기를 부여했다.
“네가 해야 할 것을 해라, 죽음이여.”
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키는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한 차례 마치고 눈을 떴을 때 그는 니플헤임의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머리 위에서 어지러이 반짝이는 무지개의 빛무리를 가르고 까마귀의 깃털이 떨어져 내렸다. 로키는 공중에서 깃털을 낚아채어 주먹 안에서 으스러뜨렸다.
아스가르드로 돌아온 로키의 눈앞에서 오딘은 그의 아들을 죽여 창자를 끄집어냈다. 그는 자신의 몸에 아들의 창자가 둘러지고 그것이 쇠사슬로 화하는 것을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로키는, 비록 오딘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증오의 크기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을지라도, 그 패륜적 형벌이 전적으로 오딘 자신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았다.
정치란 본래 그런 것이고, 로키는 오딘만큼이나 정치에 능했다. 또 하나, 굳이 부연할 필요도 없는 말이지마는 그는 추방당한 세 자식과 마찬가지로 아스 여신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에게도 아무런 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아홉 가지의 추방자들이 한데 모이는 어둡고 황막한 땅으로 그들은 로키를 데려갔다. 축축한 동굴 속 바위에 비끄러매일 적에, 로키는 시선에 아무런 표정을 담지 않으려 애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토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천둥의 신이 동굴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형이 내려지고 아흐레가 지난 후였다.
로키가 묶여있는 바위까지 다가온 토르는 두 마리 독사의 아가리에서 불규칙하게 떨어지는 독액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별안간 그 아래에 손바닥을 펼쳤다. 툭. 독액이 살갗을 때리는 소리가 기진맥진해 있던 로키의 고막을 천둥처럼 때렸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천둥이 울었는지도 모른다.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는 자신의 신을 대신해서.
“무슨 짓이야?!”
로키의 고함에 맞추어 쇠사슬이 철컹거렸다. 토르는 그런 로키를 무시하듯 태연히 그의 앞에 머물렀다. 한 손에 여전히 독액을 받아내며 다른 한 손으로 아스가르드에서 가장 공들여 손질된 갑옷을 벗은 토르는 흉갑 부분을 거꾸로 뒤집어 로키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로키의 신경은 온통 늘어뜨려진 토르의 손에 가 있었다. 아무리 강인한 전사의 손이라 해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것은 똑같았다. 오딘은 로키에게 상처가 빨리 아물도록 마법을 걸었지만 ── 그래야 그의 몸이 결코 부식되는 일 없이 오랫동안 고통을 받을 것이었으므로 ── 그와 같은 보호를 받지 못한 토르의 손등은 하얗게 뼈를 드러낸 채 아주 느린 속도로 아물어갔다.
바위에 묶인 채 맨몸으로 독액을 받아내는 것은 두 차례에 걸쳐서 빛의 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로키에게 내려진 정당한 형벌이었다. 왕자의 불필요한 자비는 오딘을 진노케 하기에 충분했다. 과연 토르는 눈썹을 조금 찡그렸다. 그러나 묵음으로 울려 퍼진 오딘의 노호를 전신으로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토르는 부동한 채 갑옷을 치울 생각이 없어 보였으며 로키 역시 더 이상 치우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나를 원망해?”
“아주 많이.”
그 대답은 로키를 만족시켰다.
“그렇다면 됐어.”
토르의 얼굴에 떠오른 질린 표정이 로키를 기껍게 했다. 그는 여전히 토르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에게 부여된 이름에 그토록 걸맞은 신도 더는 없을 것이다.
“아직도 나에 대한 생각이 변하지 않았어?”
토르는 끙 소리를 냈다. 반천년의 세월이 더 흘러서야 그는 겨우 변화무쌍하게 시간을 오르내리는 로키의 화법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더구나 기억의 변방, 먼지 쌓인 구석구석을 모조리 들추어내는 힘겨운 노력은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로키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는.
“그래.”
“아버지가 요르문간드를 바다에 던져버리는 걸 구경만 하고 있던 날처럼?”
두 번째 질문은 준비된 양 곧바로 던져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살처럼 날아와 정지한 푸른 시선에 로키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굳혔다. 분명 저를 향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먼 곳 어딘가를 헤매듯 관통하는 느낌이 토르의 눈빛에 어려 있었다. 생소한 느낌에 로키는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마찬가지로 입을 다문 토르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겼고, 이내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실로 그 날이었다. 토르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처음 내뱉은 것은.
로키는 세를, 아홉 세계를 감싼 검푸른 바다를, 그 위에 한동안 머물렀던 물거품을 떠올렸다. 거기에 한 떨기 조화(弔花)와도 같이 떨어뜨려진 연민도 결국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로키가 생각하기에 그 일은 그만치의 감정을 바칠 하등의 가치가 없었다. 가장 고결하고 긍지 높은 신은 가장 가치 없는 것들에만 눈길을, 제 마음을 주었다.
로키의 생각은 거기서 잠시 멎었고, 이윽고 헛웃음이 되어 그의 메마른 입술 끝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과연 그렇구나. 저 또한 그 보잘것없는 것들의 하나였기에.
로키는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이며 덧붙였다.
“아니면, 내가 형에게 키스했던 날처럼?”
토르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다른 생각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던 푸른 눈이 그제야 로키를 제대로 마주했다.
“너는 아무 것도 모른다, 동생아.”
“뭐? 지금 그게 형이 나에게 할 말이라고 생각해?”
로키는 토르의 말끝에 흘러나온 단어를 잔뜩 꼬집고 비틀어 돌려주면서 양양하게 웃었다. 토르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지만 부정의 의미는 아니었다. 어쩔 수 없구나. 느슨하게 내려앉은 눈꼬리 어딘가에서, 로키는 다시금 낯설음을 느꼈다.
불안 같기도 하고 기대 같기도 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미래형의 그것을 로키는 다소 초조한 기분으로 주시했다. 그의 눈앞에서 토르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곧 세계가 무너질 것이다.”
“설마 내가 그걸 모를까봐?”
“로키.”
“왜.”
“네가 존재함으로 인해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잘 안다.”
로키는 더 이상 토르가 내뱉는 말의 진부함에 부질없이 토를 달지 않았다. 토르의 화법은 화법이라 부를 것도 없으리만치 직설적이었고 로키는 그것에 진저리를 치는 동시에 그것을 경애했다. 로키는 팔짱을 끼려고 했지만, 사슬로 온 몸이 꽁꽁 묶여 있었기 때문에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짤막한 촌극을 지켜본 토르는 어렴풋하게 미소를 지었다. 로키는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토르는 흉갑 안에 가득 고인 독액을 쳐다보았다. 그것을 비우는 동안 그 자리를 대신한 토르의 손등이 또다시 타들어가는 광경을 로키는 조금 전보다 덜 놀란 눈으로 지켜보았다. 멈추었던 말을 다시 잇는 토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무탈하거라, 로키.”
내가 네 몫까지 대가를 치르겠다.
토르는 전신으로 말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명명백백한 친애였고, 눈 감은 채 고개를 돌리고 그늘 속에 숨어도 고집스럽게 따라와 비추고 마는 빛이었다.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동시에 희열이 솟구쳤다. 서로를 배척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양단의 감정들이 내부에서 뒤끓었다. 로키는 뱃속이 부글거리는 것을 느꼈다.
“거절하지.”
토르는 로키의 승낙을 종용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탁을 로키가 아무렇지 않게 거절할 때 으레 지어보였던 곤혹스러워하는 표정도 짓지 않았다. 결연함을 잘 숨긴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로키는 한 발 늦게 토르의 의중을 깨달았다. 그의 입술이 달싹여 소리 없이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이내 그것은 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절대로……”
토르는 듣지 않겠다는 듯 맹렬한 기세로 묠니르를 돌렸다. 그가 동생의 말에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이번이 꼭 두 번째였다. 망치가 허공을 가르는 묵직한 소리는 이내 바람으로 변모했다. 동굴 천장이 와르르 무너져 일시적으로 로키의 시야를 가렸다.
“토르──!!”
로키는 제 몸이 사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함을 질렀다. 바위가 부서지며 피워 올린 먼지, 혹은 다른 것으로 인해 부옇게 흐려졌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토르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
한 쌍의 늑대가 해와 달을 삼키어 어둠은 거대한 베일처럼 아홉 가지에 드리웠다. 스스로 빛을 낼 줄 아는 존재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 안에 휩싸여 허우적거렸다. 아비규환 속에서 비프로스트가 빛나고 있었다. 아니, 로키는 곧 자신의 서술을 정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지개는 빛나는 것이 아니라 불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늦은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무엇에 대해서든. 그는 파편이 되어 스러지고 있는 일곱 빛깔의 귀로에 망설임 없이 발을 올려놓았고, 앞쪽으로 훅 쏠리는 듯한 익숙한 감각에 몸을 맡겼다.
오색으로 타오르는 불꽃을 등지고 예의 대검을 발치에 꽂은 채 헤임달은 로키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헤임달에게서 발산되는 명백한 적의에 로키의 피부가 따끔거렸다. 그가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헤임달의 묵직한 목소리가 비프로스트 위에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이곳을 지나가려면 나를 무너뜨려야 할 거요.”
“멍청한 파수꾼 같으니. 세계가 어둠으로 덮이니 네 눈도 장님이 되었나? 난 네가 지키려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어. 아스가르드건, 오딘이건……”
“주신께서는 돌아가셨소. 그리고 그를 문 것은 그대가 낳은 괴물이오. 그러니 내가 그대를 잠자코 보내주어야 할 이유를 댈 수 없다면,”
로키는 헤임달이 미처 하지 않은 뒷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헤임달의 말은 반만 진실이었다. 그가 로키의 대답을 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대검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무지개의 파수는 아홉 세계에 존재하는 그 무엇보다도 순백에 가까웠다. 거짓과 기만을 관장하는 신과 그가 대치하는 것은 존재론적인 필연이었다.
로키는 헤임달의 칼끝을 백짓장 차이로 피하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근육이 부풀며 차고 파랗게 얼어붙었다.
“빛 또한 눈을 멀게 하지.”
맨손에서 만들어낸 얼음의 창을 내려다보며 로키는 중얼거렸다. 그것이 헤임달에게 한 말인지 스스로에게 한 말인지는 로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싸움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해도 달도 사라져 로키는 날짜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감각이 인지하는 범위 안에서 스러져가는 생명의 개수로 대신하여 시간을 헤아렸다. 삼천 번째로 죽어 떨어진 까마귀가 비프로스트 표면에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스러졌을 때, 마침내 그들이 기다리던 일이 일어났다.
헤임달의 칼이 로키의 배를 꿰뚫었다. 동시에 로키의 창은 헤임달의 머리 상반(上半)을 날려버렸다. 비프로스트 위로 뇌수를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헤임달은 마지막 힘을 짜내 로키에게 꽂아 넣은 칼을 더욱 힘주어 밀어 넣었고, 그의 뱃속에서 비틀었다. 로키는 목구멍에서 뜨끈하고 진득한 액체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곤 그것을 토해냈다. 전능한, 그리고 이제 부재하는 주신에 의해 오래 전에 심장에 지펴진 불꽃은 그의 몸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절절 끓여왔다. 로키는 아홉 세계에서 유일하게 붉은 피를 흘린 서리거인이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홀로 그러했던 존재로 남을 것이었다.
로키는 자신의 배에 꽂힌 칼날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비프로스트의 파수꾼, 성스러운 도시의 수호자가 마침내 쓰러진 것이다.
무릎 꿇은 채 절명한 문지기의 손에서 로키는 칼의 손잡이를 빼냈고 제 손으로 그것을 잡아 단숨에 뽑아버렸다. 뱃속이 허전해지는 것과 동시에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비프로스트를 다시 한 번 더럽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형태를 한 새 떼가 칠흑 같은 어둠을 재차 까맣게 뒤덮고 있었다. 부서진 성문 너머로 궁전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로키는 에인헤야르, 용맹한 전사들이 성난 거인들의 손에 무참히 학살당하는 것을 보았다. 요르문간드가 일으킨 대홍수에 신들이 떠내려가는 것을, 자신이 돛대에 올랐던 그 배가 헬라의 군대를 실은 채 파도를 거슬러 솟아오르는 것을, 비다르가 펜리르의 아가리를 찢어발기는 것을, 헤아릴 수 없는 수의 거인들과 괴물들과 신들이 죽고 죽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아비규환을 담담히 가로질렀다. 로키를 알아본 신들은 분노했고 그에게서 아스가르드의 냄새를 맡은 괴물들 또한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로키는 자신을 변호하는 대신에 그들을 남김없이 죽여 버렸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상처들이 그의 몸에 생겨났으나 그것은 그의 상태에 별다른 위중함을 더하지 못했다.
로키는 큰 어려움 없이 자신이 목적한 곳에 이를 수 있었다.
그는 세계를 집어삼킬 수 있으리만치 거대한 몸뚱이와 그보다는 훨씬 작으나 충분히 커다란 몸이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앞에 가 섰을 때, 로키는 요르문간드의 몸이 그을린 채 두 쪽으로 도막 나 있는 것을 보았다. 토르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로키에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로키는 어이없어하며 짧은 실소를 흘렸다. 미안하다고?
“난 네가 제 어미를 징그러울 정도로 빼닮은 계집애나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반편이 장사 놈들한테 갖고 있는 것만큼의 감정을 내 자식들에게 갖고 있지 않아. 실은 그것들을 내 자식이라고 불러야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적어도 내 자식인 건 분명하단 생각이 드는군.”
혼잣말 같은 웅얼거림을 내뱉는 로키의 배에 뚫린 구멍에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토르의 시야는 조금 전부터 부옇게 흐려져 있었다. 그는 소리와 냄새 등의, 시각을 제외한 오감으로, 전신으로 로키가 치명상을 입었다는 것을 감지했다. 토르는 힘겹게 손짓했다. 로키가 그의 옆으로 와 무릎을 꿇었다.
“끝까지 내 말을 듣지 않는구나.”
죽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르의 목소리는 먼 데서 울리는 천둥처럼 여전히 특유의 울림을 갖고 있었다.
“그건 형 때문이야.”
“허어.”
“형이 아닌 다른 것으로서 부탁했더라면 들을 마음이 생겼을지도 몰라.”
토르는 혀를 찼다. 그 크지 않은 몸짓은 주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독을 일시적으로 가속시켰고, 그래서 그는 오장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생생히 느껴야 했다. 삼켜진 비명은 신음이 되어 입술 사이를 비집고 새어나왔다.
로키는 토르의 곁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통증을 덜어주는 마법을 거는 일밖에는 없었다. 그마저도 시전자의 생명력을 급속도로 갉아먹는 유의 것이었다. 그러나 로키는 저어하지 않았다. 목숨의 주인은 이미 제가 아니며 로키 자신은 그저 그것의 운반자에 불과했다. 헬라의 통찰은 옳았다. 로키는 자신이 가장 진저리치는 것을 스스로 품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처음부터.
그는 결코 태양을 집어삼킬 수 없었다. 그는 스콜로 태어나지 않았기에 불가능성은 실존이 아니라 본질이었다. 그 언저리를 따라 뱅뱅 도는 것을 제외하고는, 선택지는 존재한 적조차 없었다.
마침표도 쉼표도 없는 노정을 밟는 가련한 위성은 제 궤도를 깨뜨리기 위해 우주 전체를 부수려 했다. 로키는 성공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검붉은 대지 위에 가로 누운,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
머리 위로 별들이 무너졌다. 라그나로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절경이었다.
“로키. 너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네게서만큼은 그런 소릴 듣고 싶지 않아.”
토르는 대답 대신 불평이 담긴 침음을 한 차례 흘렸다. 로키는 그에게 말하는 것인지 혼잣말인지 분명치 않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다시 태어나면 자식 따윈 낳지 말아야겠군.”
담담하고 무딘 목소리에서 토르는 로키의 절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배를 덮고 있는 로키의 손 위에 제 손바닥을 포갰다. 로키는 피와 그을음이 엉겨 붙은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제가 무엇을 하는지 거의 의식도 못한 채 그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제전을 연상시키는 경건한 몸짓이었다. 푸른 동자 위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있지만 결코 그것을 마주 볼 수 없는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토르는 손을 들어 로키의 볼을 쓸었다. 찼다.
“나 역시, 다시 태어나면 네 형으로는 태어나지 않으려 한다.”
태어났을 때엔 우린 형제가 아니었어. 로키는 비식 웃으며 말을 삼켰다. 그들은 잘못 태어났거나 잘못 길러졌다. 로키는 제삼의 가능성을 애써 머릿속에서 떨어냈다. 어떻게 태어났어도 어떻게 길러졌어도 결국 한 끝으로 흐르고 말았으리라는 가능성을. 모든 것은 뒤틀림에서 시작되었다. 그저 그렇게 생각해두는 쪽이 편했다.
그리고 끝이 다가와 있었다. 로키는 다소 서두르듯 토르의 말을 받았다.
“형이 한 말 중에 가장 기특한 말이군. 그럼 뭐가 되고 싶어?”
“──”
토르는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는 분명치 않았다. 로키는 서늘해진, 다시 말해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왔음을 알리는 복부의 둔통을 느끼며 토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토르는 로키의 귓바퀴에 입술을 댄 채 밭은기침 같은 엷은 웃음을 뱉어내곤 다시금 무언가를 말했다. 그 의미를 이해했을 때, 로키는 눈알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감정의 가장 작은 실낱같은 조각까지도 제 안에 꽁꽁 갈무리했다. 그 때, 천둥이 멎었다. 하늘을 잃은 세계가 무너지며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20131209. Fin. BGM : Live to Rise (Soundgar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