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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개비의 담배와 당밀 퍼지, 그리고 변하지 않는 것에서 이어짐
중앙 홀이 소란스러웠다.
해리의 호출을 받고 국장실로 향하던 론은 황금 분수를 지나치며 모여든 인파에 힐끗 눈길을 던졌다.
흔치 않은 해밝은 금색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온 것은 딱 그때였다.
론이 인파를 헤치고 중앙으로 나설 때까지도 모여든 이들은 그저 보고만 있었다. 일부는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놀란 것 같았지만, 일부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했다. 즉, 공공연히 구경꾼을 자처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중년의 남자가 드레이코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실랑이보다 몸싸움에 가까웠으나 그도 썩 적절한 단어는 아니었다. 그 광경이 ‘서로’ 다투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의해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양새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남자는 드레이코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그 사실이 론을 다소 놀라게 했다. 그가 알고 있는 드레이코에 의하면, 남자의 행동은 가장 상스러운 싸움 방식의 하나일 것이었다. 지팡이를 꺼내 제압하든지, 아니면 하다못해 경멸적인 냉소라도 한 차례 퍼붓지 않고서야 드레이코 말포이답지 않을 터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레이코는 맞서지도 비죽이 웃지도 않았다. 다만 남자가 흔드는 대로 휘청거리지 않고 꼿꼿하게 평정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 묵묵부답이 상대의 화를 더욱 돋웠음은 물론이다.
“이 자식…… 이 자식의 아빠가 내 동생을 죽였다고!”
남자의 말은 론의 걸음을 조금 멈칫거리게 했다. 그는 무심코 드레이코를 쳐다보았지만, 드레이코는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드레이코의 시야에 붉은색 머리카락이 들어오고, 회색 눈동자에 약간의 놀란 빛이 떠오른 것은 론이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을 때였다.
“실례합니다만, 선생님……”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동강 난 지팡이가 데구루루 굴렀다. 주위는 일순간 숨 막히는 정적에 휩싸였다. 드레이코조차도 론의 코에서 흐르는 피와 처참하게 부러진 론의 지팡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남자는 제가 홧김에 후려친 상대가 누구였는지 확인하고 그제야 몸부림을 멈췄다.
개중에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쪽은 오히려 론이었다. 그는 혀를 한 차례 찬 후, 빳빳하게 굳은 남자를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공장소에서 소란, 마법부 직원 폭행, 공무집행방해…… 물론 마지막 건 농담입니다. 아직은요.”
가장 심각한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구는 것은 언제나 론 위즐리의 역할이었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충실했다. 덕분에 팽팽해져 있던 공기가 약간 누그러지자, 론은 씩 웃으며 덧붙였다.
“피가 좀 나는 것 같지만 뭐, 괜찮겠죠. 하하하.”
그의 말은 남자의 기세를 한층 수그러들게 만들었다. 그것은 론 위즐리의, 다시 말해 ‘해리 포터’의 이름값 때문이기도 했고 보다 직접적으로는 론의 코에서 흘러나와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피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의 몰골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론뿐이었고, 그래서 그는 질린 듯한 드레이코의 낯빛을 곁눈으로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이 녀석 말씀인데요.”
론은 드레이코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남자를 보고 있었고, 그래서 드레이코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알지 못했다.
“동생분이 돌아가신 건 정말 슬픈 일입니다. 잃어버린 건 결코 다시 찾을 수 없으니까요. 죽은 제 바로 위의 형도, 늑대인간이 된 제 큰형도, 그리고 선생님의 동생분도요.”
하며 론은, 제 목소리가 영 태연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판에 끼기에 자신만큼 적합하지 않은 인물도 없지 않을까, 뒤늦게 후회하면서도 그러나 그는 말을 마저 끝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미 시작했기에.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누구나 악에 맞서 싸울 만큼 용기가 충분한 건 아니라고. 이 녀석 아버지나, 뭐…… 이 녀석은 더 그랬고요. 하지만 누구나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어요. 재판을 받고, 죄를 뉘우치고, 자기가 저지른 일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서서히 깨달으면서 말입니다.”
남자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어줍은 침묵 속에서 론은 몇 마디를 더 떠올렸지만 그것들은 론 자신도 돌아서면 놓아버리고 말 무실한 낱말들, 그저 철자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냥 입을 다물었고, 남자가 구경꾼을 헤치고 그곳을 떠나도록 놓아두었다.
남자의 모습이 점처럼 작아졌을 때에야 론은 고개를 돌렸다. 드레이코는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반쯤 열렸던 입술은 멈칫거리다 그대로 다물리고 말았다. 주름진 미간에 씁쓰레함이 어렴풋이 어려 있었다. 론은 그런 드레이코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과는 정반대인 시선의 방향이었다.
“피가……”
둘러선 이들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론은 코 아래를 슥 훔쳤고, 생각보다 피가 많이 묻어나는 것에 놀라 허둥거리며 지팡이를 찾았다. 그러나 손에 쥐어진 지팡이는 반쪽짜리였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머지 반쪽을 보며 론은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침묵 속에서 드레이코가 지팡이를 꺼냈다. 부러진 코뼈를 바로잡는 주문과 피를 멎게 하는 주문, 그리고 얼룩을 없애는 주문이 차례로 이어졌다. 두 사람 중 누구도 자신이 느끼고 있는 곤혹스러움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단지 그들을 둘러싼 구경꾼의 수가 여전히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
론은 휴게실에 앉아 손에 쥐고 있는, 카페테리아에서 주문한 호박 주스가 담긴 컵과 의미 없는 눈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실은, 남자의 붉어졌던 눈시울을 끊임없이 떠올리고 있었다. 드레이코로부터 사과를 듣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론의 말 때문이었다. 결코 다시 찾을 수 없는 잃어버린 것들 때문이었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한 일들 때문이었다. 조지가 더 이상 패트로누스를 불러낼 수 없는 것처럼.
의자 끄는 소리가 론을 상념에서 현실로 불러냈다. 맞은편에 앉은 이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론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그것은 이내 얄팍한 쓴웃음이 되어 흩어졌다.
“왜?”
인사도 질문도 아닌 말이 뜻보다 훨씬 더 무뚝뚝하게 튀어나와, 상대보다 내뱉은 론 자신을 도리어 당황하게 했다. 당혹감을 감추려 호박 주스를 들이키는 론을 향해 내뱉는 드레이코의 어조에는 희미하게 웃음이 어린 것 같기도 했다.
“뭐야. 그냥 위즐리잖아.”
“무슨 뜻이야?”
“놀랐거든. 아깐 다른 사람이 아닐까 싶기도 했는데 말이지.”
“딱히 널 위해서 한 말이 아냐.”
물론 알고 있었던 드레이코다. 그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였다.
“맞아. 그리고 궤변이었지.”
“뭐?”
“우리 중엔 정말로 그게 옳다고 믿었던 사람도 많았으니까.”
몰랐던 것이야 아니지마는, 그 말은 동생을 잃은 남자와 드레이코 말포이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던 순간부터 내내 론을 근질이던 엷은 후회를 조금 더 분명한 것으로 만들었다. 론은 주스잔으로부터 온기가 옮은 미지근한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가 쓰게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연 것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렇겠지. 대표적으로 네 이모 같은 사람 말이야.”
드레이코의 낯빛은 수긍하듯 담담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론은 비스듬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마치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하려는 것처럼.
“그래도 왠지 넌 안 그랬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그 말은 내가 겁쟁이였다는 거야?”
“바로 그거지.”
망설임 없는 론의 대답에 드레이코는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드레이코가 웃었다는 사실보다 그 웃음소리가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론을 더 놀라게 했다. 그 익숙함은 분명 최근에 생겨난 것이었다. 날이 바짝 서고, 적의로 가득 찬 모습밖에는 서로에게서 볼 수 없었던 학창 시절이 아니라.
잠시 후 입을 여는 드레이코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나 참. 다른 사람도 아닌 네게 그런 말을 듣다니.”
“억울하면 지금이라도 호그와트로 돌아가서 모자를 뒤집어쓰든가. 그리핀도르 배정을 받고 돌아오면 다시 생각해줄 테니까.”
지극히 론다운 응수에 드레이코는 혀를 찼다.
“유치하군.”
무어라 받아칠지 론이 고민하는 동안, 유리잔 하나가 둥실둥실 허공을 가로질러 그들에게로 날아왔다. 레몬 슬라이스가 꽂힌 잔에 소다수가 가득 담겨 있어, 파르르 끓어오르는 기포의 소리가 론의 귀에까지 들렸다. 앉기 전에 주문해둔 것인지 놀라지도 않고 태연히 잔을 집어 제 앞에 가져다 놓는 드레이코를 보며 비죽거리던 론은 별안간 들려온 드레이코의 목소리에, 소리가 아니라 그 내용을 듣고선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뛸 뻔했다.
“미안하게 생각해.”
덜그럭. 하마터면 엎어질 뻔한 주스잔이 그의 손끝에서 가까스로 바로 섰다.
론은 급하게 숨을 삼켰다.
“……뭐라고?”
“들어놓고 굳이 또 물을 건 뭐야.”
“네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서 그런다, 왜.”
“딱히 너한테 한 말은 아니야.”
론은 드레이코가 방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주었음을 이해했다. 비록 그 부연의 내용이 기꺼운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기 때문에 되레 론은 안도했고, 그럴 줄 알았다는 의미로 느짓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남은 호박 주스를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러나 드레이코의 기습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네가 겪은 일들에 대해 전혀 유감이 없다는 것도 아니야.”
“멀린 맙소사.”
부러졌다 붙은 뼈가 욱신거리는 것 같아 론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너야말로 내가 아는 말포이가 아닌 것 같다.”
“화해와 평화의 시대라잖아.”
“누가 그래?”
“사람들. 난 아니지만. 보아하니 너도 아닌 것 같네. 하지만 넌 그 인간불신을 좀 고쳐야 될 필요가 있어. 변한 게 없다고 해도, 어쨌든 우린 나이를 먹었잖아.”
“멀린의 수염만큼 나이를 먹더라도 네 충고가 필요해지는 일은 없을 거다. 어쨌든 네 말 뜻은 알았어. 넌 내가 아는 그 말포이가 맞는다는 거지.”
“알았으면 구겨진 얼굴 좀 펴. 네 애인이 보면 내가 너한테 시비라도 건 줄 알 거 아냐.”
“애인이라니, 누구 얘기 하는 건데?”
“그레인저겠지. 아무렴 포터일까. 뭐,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고는 할 수 없겠군.”
“네 그 대답이야말로 시비처럼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이냐? 그리고 분명히 말해두는데, 우리 사귀는 거 아니라고.”
“그래?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던데.”
“글쎄 아니거든. 그리고 그 말 헤르미온느 앞에서는 하지 마. 운이 좋아야 혀 묶기 저주로 끝날 테니까.”
“흠, 난 그레인저가 너랑 포터 중 하나랑 눈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웃기셔. 꼭 뭘 안다는 것처럼 말하네. 그리고 해리는 지니랑 사귀고 있거든?”
“그걸 아니까 하는 말이지.”
세기의 커플인 양 취급되는 것을 해리도 지니도 전혀 반기지 않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예언자일보는 전쟁이 끝난 직후 폐허가 된 호그와트 한가운데서 키스하는 두 사람의 사진을 버젓이 실어 내보냈었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에게 썩 나쁜 일은 아니었지만, 사생활을 침해당하는 것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지니가 한동안 짜증을 내던 것을 떠올리며 론은 설레설레 도리질을 했다.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그다지 꺼리지 않는 자신조차도 그런 일로 그만치의 주목을 받았더라면 분명 성을 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마저도 달갑지 않았지만.
“어쨌든 넌 나한테 관심이 너무 많아.”
“그럴 거야. 그게 널 짜증나게 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드레이코가 빙글빙글 웃고 있었기 때문에 론은 기가 막혔다.
“……널 상대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으리란 건 기대도 안 했다.”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레몬 소다수를 들이키는 드레이코를 보며 어이없어하던 론의 뇌리에 퍼뜩 하나의 생각이 떠오른 것은, 드레이코가 깨끗하게 비워진 제 잔을 보며 “취향 한 번 독특하네. 호그와트의 호박 주스에 비하면 끔찍하던데.”라고 중얼거렸을 때였다.
“말포이 너, 설마 헤르미온느에게 관심 있는 건 아니겠지.”
“끔찍한 소리 집어치워. 누가 그런……”
“왜! 헤르미온느가 뭐 어때서! 설마 아직도 그 피가 어쩌고 하는 더러운 단어를 들먹일 셈이야? 도대체 그 생각이 틀렸단 걸 언제쯤 인정할 거냐?”
“그 단어는 입 밖에 낼 생각도 없었거든.”
눈 하나 깜짝 않은 채 거짓말을 하며, 드레이코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나한테도 보는 눈이라는 게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보─는─누─운? 야, 헤르미온느가 어딜 봐서 너한테 꿀릴 게 있냐? 걔가 내 친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뭐, 솔직히 호그와트 시절에야……”
“랭록.”
둘은 동시에 입을 딱 다물었다. 물론 자의와 관계없이. 론은 주문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고맙기도 하지, 로날드.” 허리춤에 손을 얹고 전혀 고맙지 않은 얼굴을 한 헤르미온느의 모습은 천장 한가운데 매달린 커다란 샹들리에의 역광을 받아 무시무시하기까지 했다.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은 물론, 억울함과 짜증을 눈빛으로 표현하고 있는 드레이코는 아니었고, 어느 사이엔가 그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주변의 시선들이었다.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은 일련의, 사실 당사자들로서는 마냥 소소하게만은 생각할 수 없었지만, 작은 해프닝이었다. 론과 헤르미온느, 드레이코 세 사람의 삼각관계에 대한 소문이 생겨나고, 때마침 헤르미온느가 신비한 동물 단속 및 관리부에 근무하는 케빈 위트비의 고백을 걷어찬 탓에 소문에 힘이 실리는가 싶더니, 퀴디치 경기차 영국에 온 빅터 크룸이 헤르미온느를 찾아와 마법부를 벌컥 뒤집어놓았던 것이다.
여담으로 셋 중에서 크룸의 방문을 가장 반긴 사람은 론이었다. 크룸이 마법부에 나타났을 때 론은 이중적인 의미로 기뻐 날뛰었다. 크룸의 팔을 부러뜨릴 것처럼 열정적인 악수에 이어 그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론이 내민 스크랩북의 파격적인 두께는 소문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몇몇 이들은 여전히 ‘한때는 그랬었다’고 믿었으며, 그런 이들이 론과 드레이코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것만은 그들로서도, 그리고 빅터 크룸으로서도 해결할 도리가 없었기에 론은 그 날도 맞은편 테이블에서 자신을 힐끔거리는 시선들과 지겨운 눈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는 드레이코가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제 맞은편에 와 앉는 것이 상황에 득이 되는 것인지 그 반대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상상하지도 못한 말이 드레이코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때에도.
“‘차인 남자들’끼리 한 잔 어때?”
“입 다물어. 안 그래도 사람들이 쳐다봐서 짜증나 죽겠으니까.”
“넌 그래도 낫지. 외근을 자주 하잖아.”
그 말에는 반박할 도리가 없었던 론은 결국 드레이코를 따라 일어섰다. 그러잖아도 한 잔 걸치러 갈 참이었다는 객설을 겸연쩍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나 아보트, 지금은 롱바텀 부인이 된 리키 콜드런의 여주인에게 가볍게 고개인사를 한 후 두 사람은 구석 자리로 가 앉았다. 드레이코는 망설임 없이 파이어위스키 한 병을 주문했다.
병이 반쯤 비었을 때, 론은 드레이코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것을 의식했다. 무심한 잿빛과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 때문이었을까, 까닭 없이 불편해진 론은 앉은 자리에서 뒤척이다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왜.”
“파이어위스키를 마셔도 머리가 더 빨개지진 않는구나 싶어서?”
“무슨 헛소리야.”
하는 론은 그러나 귀뿌리가 대신 새빨개져 있었다. 조금만 술이 들어가도 피부가 붉어지는 체질은 아서로부터 몇몇 아들들에게 물려진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전혀 취하지 않았을 때에도 취했으니 그만 마시라는 소리를 들곤 했지만, 지금의 상대는 론이 취하는 것에 대해 딱히 걱정을 하거나 만류할 씀씀이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므로, 론은 알코올과 붉은색의 관계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는 대신 제 달아오른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린 후 드레이코를 향해 운을 뗐다.
“만족해?”
드레이코는 론의 뜬금없는 듯 보이는 질문이 요전번의 연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타다 남은 담배 개비가 론의 양말에 구멍을 낸 날, 론은 드레이코에게 지금과 똑같은 질문을 했었다.
만족하냐고? 드레이코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반문했다. 토씨 하나 달라지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답은 어쩌면 조금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조금은.”
론은 눈을 커다랗게 떴고, 얼마간 드레이코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게 뭐야? 만족하면 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안 드는 것도 있으니까.”
“마음에 안 드는 게 뭔데?”
“안 좋은 쪽부터 물어보는 건 배배 꼬인 위즐리의 습성 때문인가?”
“네가 뭘 좋아하든 내가 알 바 아니라서 그런다, 왜.”
내뱉은 론은 레몬 사탕 하나를 집어 오도독 깨물었다. 퉁명스러운 말투에 마음 쓸 만큼 돈독한 사이가 아닌 것을 피차 알기에 드레이코는 구태여 맞받아치지 않았다.
“이를테면, 너도 포함되어 있는 이 불쾌한 스캔들 따위가 있겠지.”
“아, 거기엔 나도 동감해. 더구나 크룸이 그 일을 알고 나서는 왠지 데면데면하게 구는 것 같단 말이야. 세상에. 난 이제 픽시 꼬리만큼의 사심도 없는데 말이지!”
네가 사심을 갖고 있는 쪽이 그레인저가 아니라 그 덩치 큰 퀴디치 멍청이라고 한다면 얘기가 다르지, 열성팬 씨. 하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파이어위스키 한 모금과 함께 다시 뱃속으로 밀어 넣으며, 드레이코는 제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대견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론은 제 잔의 바닥에 몇 방울 남은 위스키를 공연히 빨대로 휘젓다 그제야 생각이 난 사람처럼 퍼뜩 질문을 던져왔다.
“그럼 마음에 드는 건?”
“알 바 아니라며?”
론은 다시 사탕 하나를 입에 던져 넣었고, 우물거리는 탓에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말했다.
“어쨌든 뭐냐고.”
“뭐……”
땡그랑. 드레이코가 뜸을 들이는 동안, 출입문이 여닫히며 울리는 방울 소리에 론의 고개가 무심코 돌아갔다 제자리로 왔다. 담담한 얼굴로 그 시선을 좇으며 드레이코는 중얼거렸다.
“실력이 형편없는 변호사라고 해두지.”
눈을 끔벅거리는 론의 입속에서 이와 사탕이 부딪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짧은 침묵 후 론은 입을 열었다. 드레이코는 달짝지근한 레몬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뭔 소리래.”
김새는 면박에도 불구하고 씩 웃을 뿐, 드레이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술병을 기울여 론의 빈 잔에 파이어위스키를 채울 뿐이었다.
20130802. Fin. BGM : Antique Cowboy (SoundTeMP / Ragnarok Online)
* 변하는 거 그런 거 없다.
* 오랜만에 드레론을 쓰려니 영 어렵다.
* 슈발츠 BGM들 진짜 잘 만들었다. 공중파에서 들었을 땐 깜짝 놀람. 레켄베르 관련 퀘스트들도 스토리가 아주 그냥! 어휴 퀘스트하면서 그렇게 화내보긴 처음이었는데 여기까지가 제일 좋았지 싶다. 아루나부터 등산하기 시작해서 이계는 뭐... 물론 업뎃은 꾸준해야지 그렇지. 어쨌든 지금은 걍 다 소용없는 얘기.
* 드레론 후기가 아니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