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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FC, OMC

* 원작과 전혀 무관함 주의 / 그다지 말머리답지 않음 주의

 

 

 

 

 

 

 

 

 

 

 “오랜만이네.”

 “제가요, 아니면 음식이요?

 “둘 다.”

 “분명 좀 전에 소시지를 드셨죠.”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요.”

 “그럼 입 다물어. 그 우유, 내가 쏘는 거라고?”

 “입을 다물면 우유를 마실 수 없답니다, 리나 씨.”

 

 

 버릇대로 대꾸한 후, 리나의 눈썹이 추켜 올라가는 것을 보며 제로스는 잽싸게 눈앞에 놓인 데운 우유를 들이켰다. 한마디 쏘아주고 싶은 듯 리나의 입술이 달싹거렸으나 결국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제로스는, 카운터에 턱을 괸 채 조금 전의 ‘그녀’를 위해 구운 것임이 분명한 소시지를 으적으적 씹고 있는 시릴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엉뚱한 말이었다.

 

 

 “‘공주님’이겠군요.”

 “응. 아빠 닮았지?”

 

 

 받아치는 쪽도 용케 알아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시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3자에게는 사뭇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풍성한 금발이라든가 훤칠한 키 같은 것들이 닮은 것이야 사실이지마는, ‘춤추는 도라마타(이것은 본시 리나의 별명인 도라마타와 가게 이름을 합친 것이었는데 보통은 리나를 일컫는 말이었고 가끔은 가게 이름인 「춤추는 드래곤」 대신 사용되기도 했다)의 바깥양반’으로 그 무용담이 널리 알려져 있는 가우리 가브리에프에게 공주님이라는 단어는 전연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아뇨.”

 “닮았어.”

 “안 닮았어요.”

 “닮았잖아.”

 “안 닮았거든요.”

 “아우, 진짜 유치하네.”

 

 

 먼저 백기를 든 것은 리나였다. 그녀는 깔끔하게 발라진 마지막 흰 늑대 갈비뼈를 접시에 내려놓은 후, 멧돼지고기 부스러기가 군데군데 떠 있는 샤브샤브 냄비에 우동 면발을 쏟아 부으며 투덜거렸다.

 

 

 “너, 그 정도면 지금도 충분히 독점하고 있는 거라고. 당사자는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도 없는 대상한테 질투해서 어쩌겠다는 거냐?”

 

 

 제로스는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부정하기에는 자신의 독점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탓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억울한 감정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 리나는 카운터의 시릴을 손짓해 불렀다. 시릴이 귀찮은 내색을 숨기지 못하고 느릿느릿 걸어오는 사이에 그녀는 단 두 번의 젓가락질로 우동을 전부 건져 입으로 넣는 동시에 매의 눈으로 누군가 카운터의 금고에 손을 대지는 않는지, 음식 값을 내지 않고 도망가지는 않는지를 지켜보았다. 물론 제피르 시티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풋내기가 아니라면 그런 간 큰 짓은 저지르지 못할 것이었지만.

 

 

 “또 뭐예요?”

 “이거 치우고 구운 대왕오징어포랑 감자튀김, 호수 드래곤 꼬치구이, 그리고 루비나가르드 맥주 조끼(jug)로 한 잔 가져와.”

 

 

 투덜거리던 시릴은 보통의 술집 종업원이라면 두어 번은 왔다 갔다 해야 할 어마어마한 양의 빈 그릇을 절묘한 솜씨로 쌓아올려 전부 품에 안은 후, 불평의 대가로 리나에게 엉덩이를 한 차례 걷어차이면서도 접시 하나 떨어뜨리지 않고 주방까지 가져갔다. 그 재주놀음을 보며 「춤추는 드래곤」의 손님들은 ‘평소에는 허명무실, 어쩌다가 명불허전’이라는, 시릴 가브리에프의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글귀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잠시 후 시릴이 술과 안주를 가져와 내려놓고 돌아갈 때까지, 테이블의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무런 대화도 오고가지 않았다.

 리나는 루비나가르드 공국산(産) 맥주의 풍부한 거품을 만족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끼 크기의 맥주잔을 가볍게 들어 올려 순식간에 반을 비웠고, 어마어마하게 기다란 대왕오징어의 다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딱 알맞게 구워진 쫄깃하고 짭조름한 풍미가 그녀를 매우 만족스럽게 했다.

 「춤추는 드래곤」을 꾸려가면서 그녀가 유일하게 돈을 아끼지 않는 곳은 솜씨 좋은 주방장을 고용하는 일이었다. 요리 재료를 공수해오는 수고를 생각하고, 음식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생각한다면 결코 아무나 고용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의 육체적 금전적 수고에 대한 보람을 느꼈다. 기분이 좋아진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여 그녀는 평소라면 자존심, 비단 자신의 자존심만이 아니라 ‘그녀들’의 것을 포함한 자존심 탓에라도 묻지 않았을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혹시 돌려줄 생각은 없어?”

 “네? 무슨 말씀이세요?”

 

 

 대답은 곧장 날아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 얼굴은 시침을 뚝 떼고 있는 것 같았고, ‘어림도 없어요’라고 말하고 있는 듯도 싶었다. 리나는 끄응, 하고 앓는 소리 비슷하게 신음을 뱉었다. 괜한 말을 한 것이, 소득은 없고 기분만 나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제로스로서는 최선의 대답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돌려주고 말고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그것을 소유할 수 없다. 가졌다고 생각하면 다음 순간에 빠져나가 버린다. 생쥐처럼, 뱀처럼, 새처럼.

 영원이 아닌 순간의 형태라면 어떻게든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완벽주의자인 제로스는 그 가능성을 실감했던 적이 없었다. 그것의 눈앞에서 사본을 불태우거나, 그것의 팔을 휘어잡아 부러뜨리거나, 그것의 거친 살갗을 쓰다듬거나, 검은 송곳으로 그것의 뼈를 산산이 부수어놓거나, 그것의 까칠한 입술을 물어뜯거나 하는 순간들에도. 완벽주의자의 특성은 자신에게는 엄격한 동시에 타인에게는 보다 관대하다는 것이다. 하여 제로스는 그녀를 질투했다. 그들이 함께 보냈던 아주 짧은 순간은, 제로스가 겪어온 ── 보다 정확하게는 겪지 않아온 ── 수도 없는 찰나의 편린들 중에서도 가장 증오스러운 것이었다.

 

 

 “무정한 녀석 같으니. 최소한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 정도는 봐줄 수 있잖아?”

 

 

 제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으레 그러려니 여기던 리나는, 문득 그것이 평소의 무미건조한 침묵이 아니라 음울한 보랏빛을 띤 채 꿈틀거리고 있는, 아주 다른 종류의 침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제로스는 그녀를 향해 더할 나위 없이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고,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죽여 버리는 게 좋겠네요.”

 “제로스!”

 

 

 부름은 부질없었다. 순간이동으로 사라진 제로스의 빈자리를 쳐다보며 뒤통수를 긁적거리던 리나는, 이윽고 일어나 카운터를 향해 다가갔다. 시릴은 무료한 얼굴로 카운터에 앉아 동전으로 탑을 쌓고 있었다.

 

 

 “어이, 시릴.”

 “또 왜요.”

 

 

 ‘보나마나 귀찮은 일을 시키려는 거겠지’라는 의미가 명백하게 포함된 시릴의 대답을 들으며 리나는 품속에서 슬리퍼를 꺼낼까 말까를 잠시 동안 고민했지만, 자꾸 머리를 때리다가는 그나마 나은 머리마저 아버지를 닮게 될지도 모른다는 어느 단골의 말을 상기하여 가슴까지 올렸던 손을 조용히 내렸다.

 

 

 “델한테 가 봐.”

 “곧 올 텐데요, 뭐. 그리고 3번이랑 11번 테이블의 음식도 곧 나올 거……”

 

 

 조금 전보다 훨씬 더 흉흉한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리나의 눈빛을 본 시릴은 곧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완전히 다문 것은 아니고 앞치마를 벗고 카운터에서 나오면서도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여전히 구시렁거렸으니, 리나의 청력이 야생동물의 그것에 버금갈 정도로 예민하다는 것을 떠올리지 못한 탓에 ‘학습능력 부족’이라는 죄목으로 기어이 리나에게, 정확히는 리나의 슬리퍼에 뒤통수를 얻어맞으며 「춤추는 드래곤」을 나서는 시릴 가브리에프였다.

 

 

  

 

 

 * * *

 

 

 

 

 

 흥정은 어렵지 않았다. 구태여 리나의 이름을 빌릴 필요조차 없었다. 맡겨 둔 물건의 이름을 댔을 때 판매상의 얼굴에 떠올랐던, 질린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떠올리며 델은 피식 웃었다.

 델은 인적이 없는 골목길로 들어섰다. 식당으로 향하는 지름길이었다. 골목의 중간 정도 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손은 뒤에서 좇는 기척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칼자루로 옮겨갔다. 호흡을 한 차례 고르고, 마르고 작은 손등에서 힘줄이 솟구친 것은 일순간의 일이었다.

 

 

 “아스트랄 바……”

 “왁! 무슨 짓이야, 아델라! 나라고!”

 

 

 날은 아슬아슬하게 허공에서 멈추었다. 희미하게 어렸던 붉은 빛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며 델은 검을 거두었다.

 

 

 “시릴? 도대체 무슨 짓이야?”

 “깜짝 놀라게 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 퍽이나 재밌겠다. 네 머리가 반으로 잘라지면. 그리고 아델라라고 부르지 마.”

 “……넌 진짜 어린애다운 맛이 없구나……”

 “내 성년식까지 얼마 남았는지 알고나 있어?”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면서도, 델은 떠올렸다. 보이지 않는 등 언저리가 아주 잠시 동안 서늘해졌던 것을. 리나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면서도 도통 발현될 줄을 모르는 그의 유전자는 종종 엉뚱한 곳에서 힘을 발휘했다. 지금처럼. 그래도 아주 안 닮은 것은 아니라고 델은 생각하곤 했으나, 리나라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여하간 벙벙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것에 대고 더 이상 쏘아 대기도 무엇하여 델은 짤막하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마마가 널 마중 가라고 하셨는데…… 혹시 무슨 일 없었어?”

 “일? 없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망토 안쪽의 주머니에서 델이 꺼낸 것은 둥글게 말린 양피지 묶음이었다. 두어 걸음 떨어진 시릴조차 오래 묵은 종이 특유의 쌉싸래한 먼지내를 맡을 수 있었다. 해지고 바랜 귀퉁이의 모양새와 전연 어울리지 않는, 말끔하게 매듭지어진 보라색의 철끈을 보며 시릴은 무심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도구상 자드 씨가 이걸 줬어.”

 “뭔데?”

 “몰라. 자기도 모르는 사람한테 부탁 받았다면서 너한테 전해주라고 했어.”

 “나한테?”

 “응. 리나 아줌마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그랬대.”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이 마마에게 전하라고 나한테 전하라고 너한테 전하라고 자드 씨에게 선물을 맡겼다는 거야?”

 “응.”

 “……어째서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되는데?”

 “깜빡했대.”

 “뭐? 누가?”

 “그 사람이. 그렇게만 말하면 알 거라고 그랬대.”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마마에게 전하라고 나한테 전하라고 너한테 전하라고 자드 씨에게 얘기한 거야?”

 “응.”

 “……내가 말해 놓고도 무슨 소린지 도저히 모르겠다.”

 “마찬가지야.”

 

 

 델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은 것은 시릴 쪽이었다.

 

 

 “뭔지 열어봐도 되려나, 이거.”

 “네가 웬일로 이런 물건에 관심을 보여? 게다가 이거 리나 아줌마 물건이라고.”

 

 

 시릴은 그녀가 대답을 시작할 때 이미 매듭의 한쪽 끝을 당기고 있었다. 델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촘촘하게 말린 양피지는 손끝에서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한 장 한 장, 매수를 헤아릴 때마다 한 움큼씩 먼지가 날려 두 사람은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종이는 전부 다섯 장이었고, 중간 중간 커다란 솥이나 불을 뿜는 용과 같은 묘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시릴은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빼곡하게 들어찬 첫 장을 델에게 건넸다.

 

 

 “읽을 수 있겠어, 아델라?”

 “델이라니까. 그리고 이건 고대 문자 같아. 일단 맨 앞에 적힌 건…… ‘전설’이네.”

 “전설? 그 다음은?”

 “전설……적인, 드래곤.”

 “오! 설마 무시무시한 고대의 마도가 적힌 비밀문서나, 보물이 산더미처럼 쌓인 드래곤의 동굴 지도인……”

 “버섯……전골의 조리법.”

 “……뭐?”

 “‘전설적인 드래곤 버섯전골의 조리법. 독자 요청 특별부록. 드래곤수염버섯과 도마뱀꼬리버섯 확실하게 구별하기’.”

 

 

 적막한 골목에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멍하니 선 시릴의 손에서 펄럭거리며 빠져나가려는 양피지들을 델이 잽싸게 잡아챘다. 그 통에 모서리가 살짝 바스러졌지만, 델은 솜씨 좋게 양피지를 말아 감아 감쪽같이 원래의 모양새로 돌려놓았다. 그 때까지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다, 시릴은 퍼뜩 생각났다는 것처럼 물었다.

 

 

 “저기, 이걸 준 게 누구라고……?”

 “들은 적 없다니까. 어쨌든 리나 아줌마가 원하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네. 집에나 가자. 배고파.”

 “응.”

 

 

 심드렁한 델의 대꾸에 시릴도 더는 말을 않았다. 사위는 어느덧 어두워져 있었고, 돌아올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 리나는 성을 내고 있을 것이었다. 아마도 시릴에게. 시릴은 델이 내민 양피지 꾸러미를 품에 잘 갈무리했고, 어느 사이엔가 저만치 앞서 걷고 있는 그녀를 허겁지겁 따라잡았다. 고꾸라질 것처럼 허둥대는 커다란 덩치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본 델은 그러나 말없이 보폭을 좁혀 시릴에게 걸음을 맞춰주었다. 그 또한 리나가 본다면 한심해할 일이었을 터이다.

 

 

 “저기, 아델라.”

 “너…… 관두자. 왜.”

 “소시지 다시 구워 줄까?”

 “당연하지. 오믈렛도 만들어줘.”

 “그래, 그래.”

 

 

 

 

 

20130624. To be c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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